버락킴의 극장

이유 있는 1위, 깊은 울림 주는 <재심>의 두 가지 힘

너의길을가라 2017. 2. 2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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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8월,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택시 기사 유 씨(42세)가 흉기에 십수 차례 찔려 살해 당했다. 마침 오토바이를 몰고 현장을 지나가고 있던 최 군(16세)가 이 끔찍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다. 1심에서 범행을 부인한 최 씨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는 범행을 시인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010년 형기를 가득 채우고 세상을 돌아왔다. (9년 7개월 만에 특사로 출소) '군'이라는 호칭이 '씨'로 바뀔 만큼 긴 세월이었다. 그리고 2013년 4월 최 씨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再審) : 이미 확정된 판결에 대하여 중대한 하자가 있음을 이유로 소송 당사자나 기타 청구인이 그 취소와 변경을 청구하여 다시 하는 재판


▲ "잡히고 나서 바로 경찰서에 간 게 아니라 여관을 데려 갔다. 거기서 머리도 때리고 무자비하게 폭행 당했다. 범행을 거부하면 더 맞았다.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다" (최 씨)

▲ "내가 죄인이야, 뭐야? 그때 일은 기억 안 난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13년과 2015년 두번에 걸쳐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을 다뤘다. 최 씨의 억울한 사연을 소개하며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했고, 2015년에는 진범이 따로 있다는 제보자의 진술을 추가로 확보해 공개했다. 당시 혈흔과 증거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경찰은 폭행 · 강금 등 강압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 만들기'에 몰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 참담한 진실 앞에 국민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타락한 공권력, 부패한 공권력의 추악한 민낯에 또 한번 몸서리를 쳐야했다. 정말이지 진저리가 났다. 


법원은 최 씨가 불법 체포 · 감금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새로운 증거(증인)가 확보된 점을 들어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지만, 검찰은 이에 대해 항고로 맞섰다. 대법원은 재심을 인용하기로 결정했지만, 검찰은 또다시 재항고로 어깃장을 놨다. 대법원이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드디어 최 씨에 대한 재심이 열리게 됐다. 그리고 지난 2016년 11월 17일, 광주고법 제1형사부(노경필 부장판사)는 "검찰이 확보한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충분하지 않다"면서 최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실제 사건에 대해 듣는 순간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소재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이란 것이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김태윤 감독)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유명(?)해진 이 사건이 영화로 제작됐다. 바로 <재심>이다. (물론 김태윤 감독이 이 영화의 연출에 착수한 건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송되기 전이라고 한다.)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상업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데, 15일 개봉한 이래 줄곧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개봉 첫 주에는 <조작된 도시>와 함께 쌍끌이 흥행 구도'를 형성했고, <23아이덴티티>, <존윅-리로드>, <싱글라이더>가 개봉한 22일에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재심>의 흥행은 쟁쟁한 작품들 사이에서 거둔 쾌거라 더욱 의미가 깊다. 


이처럼 <재심>이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열광적인 입소문의 파도를 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무래도 '실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극적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또,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점에서 관객들은 이야기에 훨씬 더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를 볼 때, 시작과 함께 나오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내용의 자막은 자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를 고쳐잡게 만들지 않던가?


타이밍도 좋았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도중,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최 씨에 대한 재심이 '무죄'로 결론나면서 영화의 '타당성'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비롯해 <재심>의 김태윤 감독, 그리고 함께 분노했던 국민들의 '판단'은 정확했던 셈이다. 분명 이 '교감'이 '상승 작용'을 일으켰으리라. 흥행의 측면에서 볼 때, '결과'를 모른 채 영화가 개봉됐다면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들지만, 지금의 '해피 엔딩'에 만족하기로 하자. 



이렇듯 <재심>의 첫 번째 힘이 '실화'라면, 두 번째 힘은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속물 변호사 이준영(실제 사건에서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이름은 박준영이다.) 역을 맡은 정우와 억울한 누명을 쓴 조현우 역을 맡은 강하늘은 탄탄한 연기 내공을 뽐낸다. 오랜 무명 생활 끝에 tvN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 정우는 <히말라야>, <쎄시봉> 등에 출연하며 꾸준히 대중 앞에 섰다. 하지만 <히말리야>에서는 황정민, <쎄시봉>에서는 김윤석에 가려져 '정체'됐다는 인상을 줬다. 


하지만 <재심>에서는 기존의 틀(어쩌면 그는, 그가 연기했던 '쓰레기' 역에 지나치게 묶여 있었는지도 모른다)을 깨고 한층 성숙한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의 포인트가 살인 누명을 쓴 조현우의 억울함보다 속물 변호사 이준영의 변화와 성장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의 존재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기만 하다. 그 무게감을 잘 견뎠다고 해야 할까. 특유의 장난기와 진지함을 동시에 그리고 적절히 표현했는데, 그가 지닌 또 하나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폭발력'도 영화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강하늘은 기존의 '착한' 이미지를 과감히 탈피하고, 저돌적이고 터프한 캐릭터를 맡아 변신을 시도했다. 보여줬던 놀랍게도 이 변신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오히려 강하늘이 원래 이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만큼 강하늘의 연기는 안정적이면서 깊고 단단했다. 그러고 보면 <동주>에서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청년 윤동주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그려냈고, SBS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에서는 8황자 왕욱 역을 맡아 선과 악을 넘나드는 연기를 펼쳐보였던 그였다.



이처럼 정우와 강하늘, 두 젊은 배우의 '기'가 맞부딪치면서 발현되는 에너지는 <재심>의 관람 포인트다. 여기에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두 사람의 힘겨운 싸움이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승리가 짜릿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토록 힘겹게 싸워야만 '겨우'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정의'인가, 라는 답답함과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법의 존재 이유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지만, 여전히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법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아니겠는가.


김태윤 감독은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는데, 정말이지 하루빨리 그런 세상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사회가 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우선돼야 한다. 강압적인 수사를 했던 경찰은 물론이고, 검사, 판사, 국선 변호사 모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비록 '무죄' 판결이 나긴 했지만, 그 반성이 없다면 여전히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은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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