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압도적인 영화 <위플래쉬>가 한편으로 불편한 이유

너의길을가라 2015. 3. 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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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의 100분!'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위플래쉬(Whiplash)>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학생의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모욕과 학대를 서슴지 않는 지휘자 플렛처 교수(J K 시먼스)의 카리스마와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다는 앤드류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긴장감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영화 곳곳에서 들려오는 재즈음악과 이를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분주한 움직임들이 자아내는 향연은 바짝 얼어있던 관객들을 무장해제시킨다. 


긴장과 무장해제의 반복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약 9분 동안 이어지는 앤드류의 광기어린 드럼 솔로 연주를 위한 전주곡인 셈이다. 영화의 제목인 위플래쉬(Whiplash)는 영화 속에서 밴드가 연주하는 재즈 곡의 제목이면서, '채찍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드럼의 속도감 있는 '더블 타임 스윙'이라는 주법의 독주가 돋보이는 '위플래쉬'는 영화의 내용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Good Job!)'야"


플렛처 교수에게는 그 자신만의 확고한 교육 철학이 있다. 그는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인 찰리 파커를 만든 원동력, 파커가 '버드'로 기억되도록 만들었던 것은 조 존스가 연주 도중 실수를 한 파커를 향해 던진 심벌즈였다고 말한다.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파커는 극도의 부끄러움을 느꼈고,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했기 때문에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앤드류가 "선은 지켜야죠"라고 말해봤자, 그걸 뛰어넘지 못한다면 제2의 찰리 파커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렛처 교수의 교육 방식은 모욕과 학대로 이뤄져있다. 혹독하다는 표현마저도 가볍다고 생각될 정도로 철저히 인격을 짓밟고 뭉갠다. 자신의 템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둘렀을까, 끌었을까?(Rushing or Dragging?)"라며 박자에 맞춰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마치 조 존스가 심벌즈를 던졌던 것처럼 플렛처는 의자를 집어던진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재즈 음악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극한을 향해 달려가는 앤드류의 드럼 연주는 황홀 그 자체다. 하지만 교육적 시각에서 봤을 때, <위플래쉬>는 논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비록 최고를 만들겠다는 플렛처의 욕망과 최고가 되고 싶다는 앤드류의 욕망이 조우(遭遇)했고, 그들이 서로를 '용납'했다고는 하지만 모욕과 학대가 교육상 그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허용될 수 없다는 건 사회적 합의에 해당한다.


아무리 좋은 결과(앤드류는 극한에 이르렀다)를 낳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과정이 용인되는 건 아니다. 혹자는 예체능에 한해서는 대상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교육법이 일부 허용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나이브한 태도를 취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내면에 깊은 상흔을 남길 수 있는 교육 방법은 영화 속에서 '션 케이시'를 자살로 몰고 갔던 것처럼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만다. (플렛처 교수는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자살한 자신의 제자 션 케이시의 죽음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인격을 짓밟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방식만이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리 없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극한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만약 플렛처 식의 교육 방식을 용인한다면, 교육 현장(특히 예체능)에서 행해지는 온갖 형태의 인권유린에도 '공평하게' 눈을 감아야 한다. 과연 이를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있을까?


<헤럴드경제>의 노연주 기자는 <위플래쉬>를 소개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거나 열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며 회자되고 있'다며 좋은 게 좋은 식의 해석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위플래쉬>가 던지는 고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플렛처 교수의 교육 방식에 '감동'하고, 그에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화답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례가 일상적으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에도) 간혹 언론을 통해 음대 · 미대에서 학생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교수들의 만행(蠻行)이 소개되곤 한다. 선수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가하는 코치들의 사례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혹시 그들도 플렛처 교수처럼 "한계를 뛰어넘는 너희들을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극한에 이르기 위해서 모욕과 학대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진 않을까?


압도적인 전율을 선사하는 <위플래쉬>는 분명 환상적인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그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사회가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는 모욕과 학대에 지나치게 관대한 사회적 · 문화적 특성과도 무관치 않다. <위플래쉬>는 '교육'에 대해, '욕망'과 '인간'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벼이 영화 속 음악만 소비하기엔 아까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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