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외국인 노동자 문제,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너의길을가라 2013. 4. 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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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기준으로, 국내 상주 15세 이상 외국인은 111만 4,000명이고 그 중 취업자 수는 79만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적별로 따져보면, 한국계중국인이 35만 7,000명, 베트남인이 8만 2,000명, 중국인이 5만 6,000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고, 미국인과 캐나다인 4만 6,000명, 인도네시아인 3만 1,000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해서 가장 '무난한' 대답은 인류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장벽을 없애고, 그들은 따뜻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함께 살아가는 인류로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말은 쉽다. 그 쉬운(?) 대답의 주인공들은 대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반면, 그 외국인 노동자들과 일터에서 직접 부딪쳐야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대개 부정적인 대답이 날아올 것이다. 때로는 과격한 발언까지 곁들여서.. 어쩌면 우리는 그 태도를 두고, 편협하다거나 옹졸하다거나 민족주의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양 거만을 떨면서 말이다. 오늘 벌어서 오늘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장벽을 없애자'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외국인 노동자들에 밀려 일감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하나다'라며 인류애적 사랑을 과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이쯤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들어보자.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 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며했다. 이 방벽의 이미지, 전기 시설로 빈틈없이 무장한 복잡물의 이미지는 베를린 장벽과 섬뜩하리만치 닮았다. 다만 그 기능이 정반대일 뿐이다. 이 벽의 목적은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국경을 열고 이민자를 받아들이자고 설교하는 다문화주의적인 '관용적' 접근방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뚜렷한 징표다. 국경을 연다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날 것은 현지의 노동계급일 것이다. 그러므로 '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모두 들여보내라'는 유약한 자유주의 '급진 세력'의 손쉽고 공허한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인 나라들이 몰려있는 유럽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골칫덩어리다. 그들 역시 '장벽'을 만들었고, 지금도 '장벽'을 세우고 있다. 유럽도 그러한데, 우리라고 별 수 있겠냐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장벽'을 세우는 일이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고 강변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의 '장벽'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무작정 장벽을 무너뜨리고,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여 경쟁을 시키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없듯이(그랬다가 자국의 실업률은 끝없이 오를 테고, 노동 시장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장벽을 높이 세워 서로를 서로에게서 격리시키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없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고 있듯이,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고착화되어 있고, 더욱 심회되어만 가는 부의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근원적인 문제를 그대로 두고, 피상적인 문제에만 몰입하게 되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자국에서는 더 이상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일감을 찾아 타국으로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허황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그러한 벽을 무너뜨릴 주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단시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유엔이 사실상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고, 미국이나 중국이 그런 역할을 떠안을 리도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결국 '우리들'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그런 생각들이 모여 또 하나의 힘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리라. 


당장 필요한 '장벽'을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일도 중요하다. 자국의 사정에 맞게, 사회적 합의 속에서 장벽의 처리 문제를 고민하는 것 못지 않게 '진정한 장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무너뜨릴 대안들을 찾아보는 노력 또한 함께 병행되어야만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처리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것보다는 외국인 노동자가 양산되는 원인을 두고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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