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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 일관성 없는 성추행 판결, 신체 부위별로 다를까?

너의길을가라 2015. 1.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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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행(醜行) : 성욕의 흥분 · 자극 ·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서 객관적으로 건전한 상식 있는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 · 혐오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체의 행위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퀴즈(?)부터 풀어보자. 직장 상사가 자신의 방으로 여직원을 불러서 "자고 가라"며 손목을 잡았다. 이 행위는 과연 추행일까, 아닐까? 상황을 놓고 판단했을 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추행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은 1심과 2심의 결과를 뒤집고, 이를 추행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상당히 의아한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좀더 자세한 판시 내용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손목은 그 자체만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신체 부위로 보기 어렵다"면서 "쓰다듬거나 안으려고 하는 등 성적 의미가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손목을 잡은 것은 B씨를 다시 자리에 앉히려고 한 행동이지 추행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추행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신체 부위'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일까? 판결 내용을 보면 그런 뉘앙스가 매우 짙다. 우선, '손목'은 그 자체만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신체 부위로 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손목이 일반적으로 젖가슴(판례는 윗가슴과 젖가슴을 구분하고 있다)과 엉덩이처럼 성적으로 민간한 부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결론내릴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2004년 4월 대법원은 "추행은 신체 부위에 따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피해자가 혐오감을 느꼈다면 추행"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 피해자의 의사를 기준으로 삼은 이 판결은 그동안 추행 여부를 판단하는 데 리딩 케이스가 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의 흐름은 신체 부위가 어디냐에 따라 추행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2012년 서울중앙지법은 ''는 "사회통년상 성적으로 중요한 의미 있는 신체 부위가 아니"라고 했고, 2013년 대전고법은 '쇄골'과 '손바닥'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했다. 더군다나 2012년 대구지법은 '윗가슴'을 '젖가슴'과 구분해서 "성적으로 민간한 부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런 정도이니 '손목'과 '발목'이 추행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젖가슴'이나 '엉덩이' 정도가 아니면 추행이 성립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특정 신체 부위 접촉만을 놓고 추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 원칙이다. 대법원이 내놓은 입장도 그렇고, 원론적으로도 그렇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도 피해자 의사, 성별, 연령, 이전부터의 관계, 사건 경위 및 경과, 행위, 주변 상황 등을 종합한 결과 성희롱은 될 수 있어도 추행까지는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2004년 판결의 가장 중요한 취지인 '피해 당사자의 성적 수치심에 대한 고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해보인다. 오히려 가해자(대부분 남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모습까지 엿보인다. 이에 대해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집행위원장은 "최근 대법원이 피해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남성 중심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성추행에 대한 판결들이 판사의 명확한 기준에 의해 이뤄지기보다는 판사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지나치게 '케바케(case by case)'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편의점에서 10대 아르바이트 여학생과 악수를 하며 2~3분 동안 손을 비빈 A씨는 강제추행이 인정된 1심이 뒤집혀 무죄가 선고됐다. 장난감 나무도끼로 초등학교 여학생의 성기를 때린 B교사는 과실 가능성이 인정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어떤가? 이쯤되면 '운(運)'에 맡겨도 될 것 같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법적 불확실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사회의 구성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디 법원이 성추행과 관련해 일관성 있는 판결을 내림과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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