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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수는 억울하다? 다시 가해자 중심주의가 꿈틀된다.

너의길을가라 2018. 3. 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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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미 덫에 걸린 짐승처럼 팔도 잘렸고, 다리도 잘렸고, 정신도 많이 피폐해졌습니다. … 25년전 잠시나마 연애감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언어는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애매모호하다. 도대체 그가 걸린 '덫'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덫은 누가 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무고하게 덫에 걸린, 그래서 이해받고 동정받아야 할 피해자일까. 대관절 '연애감정'이란 또 무슨 말일까. 상대방이 없는, 상대방이 거부하는, 상대방이 진저리치는 연애감정이 가능할까.


사과의 ABC를 따질 것도 없이 매우 충격적인 사과문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배우 오달수의 뒤늦은, 그리고 뒤틀린 사과문이다. 전국민이 알게 된 유명한 사과 문구이기도 하다. 오달수는 지난 2월 26일까지만 해도 '지난 20, 3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며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사실이 아니"라며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실명을 내건 피해자가 등장하자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28일, 오달수의 소속사 스타빌리지엔터테인먼트는 오달수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앞서 인용했던 것처럼 그 내용은 진정한 사과라고 하기 민망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푸념 수준이었다. 게다가 '기억이 솔직히 선명하지는 않다', '어떻게 말하든 변명이 되고 아무도 안 믿어 주시겠지만'이라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정체 불명의 사과문이 효과를 본 것일까. 일각에서 '오달수는 억울하다'는 여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25년 전의 일이지 않느냐'며 지금의 상황은 오달수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라고 (대신) 항변했다. 그런가 하면 '(피해자가) 호텔에 따라들어간 것부터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 거 아니냐'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그런가 하면 오달수의 전 매니저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오달수를 변호하는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그는 3개월 정도 오달수와 함께 일했는데, '이번 소식이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술자리에 여자가 있어도 절대 여자에게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술자리 80%이상은 남자들 뿐이었고 여자와 함께 있다고 해도 여자 몸에 절대 손 한번 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청와대 국민 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배우 오달수 씨는 미투운동의 또 다른 피해자입니다'라는 청원이 제기됐다. 오달수와 관련된 인터넷 기사에는 '도대체 오달수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오달수 완전 억울할 거 같아요'라는 내용의 댓글이 제법 눈에 띤다. 이처럼 오달수를 둘러싼 논란은 조민기, 조재현 등 기존의 미투 운동 가해자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결이 다르다고 할까. 


다른 가해자들에게 따끔한 비판과 지적이 있었던 것과 달리 오달수의 경우에는 우호적인 여론이 제법 된다. 그의 사정을 이해하려 들고, 안타까워하기까지 한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에게 정서적으로 이입하려 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풀이해야 할까. 가해자 중심주의의 망령(망령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만연한 현상)이 되살아난 느낌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의 평판에 귀를 기울이는 '전통적인(?) 사회 분위기가 다시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가해자 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에 철저히 갇혀 있었다. 가해자를 탓하기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그것이 피해자가 야기한 문제인양 취급했다. 



'그게 무슨 성희롱이야.', '그럴 의도가 없었어.', '너무 예민한 거 같은데.', '에이,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여자가 조심을 해야지 말이야.'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는 피해자를 억압했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용기를 낸 피해자의 고백은 보복과 불이익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오달수는 이런 사람이므로 그럴 리 없어', '오달수는 좀 억울한 거 같아.'라는 생각만큼 위험한 게 있을까. '가해자'를 우선시하는 이 끔찍한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게 된다면 피해자들은 더 이상 용기를 낼 수 없다.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미투 운동에선 '피해자'라는 말보다 '생존자(survivor)'라는 말을 사용한다.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 죽음과도 같은 상황을 견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해자 중심주의가 고개를 들면, 자연스레 피해자의 부담이 가중된다. 벌써부터 미투 운동을 '마녀사냥'이라 부르는 시각이 제기됐고, 이들은 피해자에게 '실명'을 강조하고 있다. 실명을 '까고' 얘기해야 믿어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가해자는 한가롭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가해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전히 말하지 못한다. 겨우, 겨우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가해자가 억울할지 모른다고 편드는 것일까. 가해자의 입장을 고려해 보는 놀라운 이해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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