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 여성 대통령 얻은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실

너의길을가라 2015. 10. 12. 10:31
반응형


한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을 특정한 한 가지로 제한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상징적인 '이름'을 갖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공화당의 존 메케인 후보를 꺾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 됐을 때, 전 세계의 언론들은 일제히 그를 이렇게 불렀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재임한 약 6년의 기간동안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인권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오바마를 두고 '검은 백인'이라 부르는 등 비아냥이 난무하기도 했고, 지난 2014년 8월 미주리 주 퍼거슨에서 비무장 상태였던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18세)이 백인 경찰이 쏜 총에 숨진 이른바 '퍼거슨 사태'는 흑인 인권이 여전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흑백 간의 감정 싸움이 더 짙어지고 있고, 경제적 격차도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바마가 흑인 인권과 관련해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2017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오바마는 "몇 년 뒤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되는데 나는 아직 매우 젊다. 이전에 하던 일 쪽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며 흑인 인권 운동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한편, 2012년 대한민국도 '최초의' 대통령을 맞이했다. 바로 최초의 '여성'이라는 이름의 대통령 말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 박 대통령은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가장 큰 변화와 쇄신"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선거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어필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여성'과 '여성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며 그 차이를 두고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간에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것도 왜곡된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가부장적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대한민국 사회가 아니던가? 그런 만큼 여성 대통령의 존재는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인권이 신장(伸張)되고, 남성 중심주의 사회의 폐단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덤덤함을 잃지 않았다. '여성'과 '여성성'은 그야말로 별개의 카테고리였으니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에 꾸준하게 보여줬던 '여성 인권에 대한 무시(無視) 혹은 외면'은 지난 3년의 기간동안 변함없이 이어졌다. 여성 인권 문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한 '일베'의 등장 등 악화일로를 걸었다.



외부의 눈으로 바라본 대한민국 사회, 더 정확히는 대한민국 공직 사회 속 여성 인권은 어떤 모습일까? <이데일리>는 미 육군본부(펜타곤)에서 일하고 있는 13급 공무원(1~15급 중 15급이 최고위직이라고 하니 그를 고위 공직자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장혜숙 씨를 인터뷰 했는데, 그가 내던진 돌직구는 생각보다 큰 고민을 던져줬다.



"미국 공직사회에서는 비서에게 커피 심부름을 절대로 시키지 않습니다. 회의장 한쪽에 간식을 갖다 놓으면 고위직 공무원들 스스로 챙겨 먹습니다. 비서는 스케줄을 관리하는 어시스턴트(assistant)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에서는 비서를 뽑아놓고 고위직들의 간식 심부름까지 시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 펜타곤에는 전문성 있는 60~70대 공무원이 적지 않습니다. 제 나이는 아직 몸이 피곤할 때가 아닙니다. '여성은 집에서 애나 키워야 한다'는 시절은 지났습니다. 60대에도 팔팔하게 일할 것입니다."


물론 장 씨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단지 '여성'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공직 사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질타였다. 하지만 그 권위주의가 특히 여성에게 더욱 잔혹한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은가. '여비서'라는 어휘가 갖는 묘한 어감은 그들의 역할이 일종의 '(굳이 성적인 의미를 빼더라도)접대'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선배들이 평소 커피 심부름을 많이 시킨다. 한 번은 커피를 스무 잔 넘게 뽑고 있었는데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김국진이었다. 김국진에게 커피를 주려고 하니 김국진이 자신은 후배들에게 커피 심부름 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김숙, KBS 2TV <해피투게더> 방송 중)


하지만 '커피 심부름'은 비단 '비서'에만 국한된 '업무(!)'가 아니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부하 직원들(대체로 여성일 것이다)에게 선배의 커피를 챙기는 일은 일상화된 일이다. "커피 한 잔 드실래요?"라고 여쭈는 것이 사무실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센스가 되어 버렸고, 젊은 직원들에게 "커피 한 잔 부탁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일그러진 문화는 여성 인권의 현실을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여성 대통령의 등장은 그만큼 여성 인권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게 정답인 것 같다. '선순환' 구조가 이뤄져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흐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치녀', '맘충' 등 여성에 대한 혐오가 더욱 강화되고 도드라지고 있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커피 심부름'으로 대변되는 여성에 대한 권위주의적 접근이 사라지고 있지 않은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여성이 특정 단체의 '장(長)'을 맡거나 유리천장을 뚫고 고위직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여성들의 일상적인 삶이 얼마나 달라지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첫 여성 대통령을 얻은 대한민국 사회가 왜 이런 고민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일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