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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성실함을 보여준 <귓속말>, 반격의 2막이 시작된다

너의길을가라 2017. 4. 1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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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비(法匪)와의 싸움을 그린 SBS 월화 드라마 <귓속말>은 방영되기 전부터 커다란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갓지성'이 가고 '갓보영'이 온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이보영이 3년의 공백을 깨고 복귀한 작품이기도 했지만, 역시 가장 화제가 됐던 건 극본을 쓴 '작가'의 이름이었다. 박경수, 무려 박경수 작가였다. 그가 누구인가. SBS <추적자>(2012), SBS <황금의 제국>(2013), SBS <펀치>(2014)까지, 이른바 권력 3부작으로 연달아 '홈런'을 쳤던 장르물의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그는 전작들에서 곪아터진 대한민국의 처절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정치 · 경제 권력들 간의 암투와 그 부패상을 다루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탁월한 필력을 뽐냈다. 묘사는 섬세했고, 시선은 날카로웠다. 명쾌한 대립과 선명한 싸움은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 긴박함이 해소되는 순간들은 찌르르 하는 쾌감을 선사했다. 시청자들은 그 '시원함'에 매료되고 중독됐다. 어느덧 믿고 보는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필력은 <귓속말>에서도 여전했다. 드라마의 제목과 같이, 그의 예리한 언어들은 '귓속말'처럼 다시 한번 시청자들을 집중시켰다. 


13.9%(닐슨코리아)로 시작한 시청률은 꾸준하고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하면서 8회 16.0%까지 올라왔다. 이러한 결과는 <귓속말>이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기대치 혹은 눈높이를 충족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요구란 무엇인가. 바로 '개연성'일 것이다. <귓속말>과 같이 '범죄'와 '법'을 다루는 드라마의 경우, 어느 장르의 드라마보다 그 요구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번에도 박경수 작가는 자신의 글을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악은 성실하다" 


지금까지는 1막에 불과했다. "악은 성실하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던 <귓속말>은 지난 8회동안 '악의 성실함'을 집요하게 묘사했다. 마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불법은 성실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드라마가 보여준 '악'이란 결국 '불법'과 맞닿아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법률회사 태백의 경영권을 두고 최일환 대표(김갑수)와 보국산업의 강유택 회장(김홍파) 간의 패권 다툼은 드라마의 큰 축인데, 여기에 태백과 보국산업이 함께 연관돼 있는 방산비리가 또 다른 핵심이다.


이러한 비리를 알아채고 취재에 돌입했던 김성식(최홍일) 기자는 최일환의 딸 최수연(박세영)의 사주를 받은 백상구(김뢰하)에게 살해 당한다. 최수연의 연인 관계인 강유택의 아들 강정일(권율)도 이 범행을 함께 한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그들은 기자의 절친인 신창호(강신일)에게 누명을 씌운다. 신창호가 김성식에게 빌린 돈이 있었던 사실은 좋은 '살해 동기'로 둔갑한다. 여기에서 끝일까. 괜히 악은 성실하다고 하겠는가. 최일환은 판사였던 이동준(이상윤)에게 압력을 행사해 신창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일종의 '마침표'를 찍은 셈이랄까.


한편, 경찰이었던 신창호의 딸 신영주(이보영)은 살인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고, 급기야 경찰 신분도 잃게 됐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의 무고함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이용해 이동준과 동침하는 동영상을 촬영해 이를 무기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신영주는 '창녀'라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다소 과해보이기도 하는 이와 같은 설정들은 달리 생각하면 저토록 성실한 '악'을 상대하려면 얼마나 처절하게 모든 것을 버린 채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하기만 했다.


대립과 반목이 거듭됐고, 배신과 새로운 판짜기가 수차례 이어졌다. 같은 배를 타기로 한 이동준과 신영주는 힘겨운 싸움을 벌인 끝에 '최수연의 증언 동영상'과 '신창호 1심 판결문'을 삭제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신영주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동준에게 넘겨준 USB에는 신창호와 김성식 기자의 팟캐스트 방송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보국산업의 방산 비리를 취재한 것이었다. 다 함께 모여서 승리의 휘파람을 부는 듯 했던 법비들의 얼굴이 구겨지는 장면은 시원함 그 자체였다. 



"스퍼커 폰으로 해줘요. 강정일 씨, 보이나요? 당신이 죽인 김성식 기자. 최일환 씨, 보입니까? 당신이 수술실에서 죽이려 한 신창호 기자. 한 분은 떠났고, 한 분은 떠나겠죠. 하지만 내가 남았어요. 최수현 씨 증언 동영상, 지금 법원에 제출할 거예요."


이동준은 "신영주 씨, 멈춰요. 이 사람들 못 이겨요. 당신도 다칠 겁니다."라며 신영주를 만류하려 해보지만, 신영주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를 거부하고 이렇게 말한다. "강정일 씨, 강유택 씨, 최일환 씨, 싸움은 이제 시작이에요. 이동준 씨는 선택해요. 내 옆에서 싸울지, 당신도 나하고 싸울지." 소름이 돋을 만큼 짜릿한 순간이었다. 이동준이 과거 판사로서의 영민함과 법비들과 부대끼며 깨달은 싸움법을 통해 절반의 승리를 거머쥔 채 멈추려 했다. 하지만 신영주는 달랐다. 그는 법비들과 끝까지 싸우는 정의로운 길을 선택했다. 


제2막이 시작된 것이다. 반환점을 돈 <귓속말>은 앞으로 신영주의 반격이 스토리의 주된 축을 담당할 것이다. 제작진도 "이제 박경수 작가의 진면목이 본격적으로 발휘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과연 이동준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처음에는 적으로 만나서 동지가 됐고, 이어 연인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결국 다시 한 배를 타게 될 것이다. "반격을 선언한 영주가 정의로우면서도 인간적인 이동준과 어떤 합체를 이뤄 악의 세력을 무찔러 나갈 지 기대해 달라"는 제작진의 힌트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드라마의 '끝'을 짐작해 본다면, 분명 '진실'과 '정의'가 법비들에 승리하는 짜릿함과 통쾌함이 가득할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박경수표 드라마가 계속해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드라마적인 재미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박경수 작가의 드라마, 그 속에 담긴 인간 군상들과 그들이 태연히 저지르는 각종 비리와 범죄들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복사한듯 똑같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태와 적폐가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고, 이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성실함'을 발휘하고 있다. 정권 교체라는 이름 하에 정치 권력의 교체가 시대적 요구로 자리잡았다. 현재까지의 판세를 종합해서 볼 때,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 두 명의 후보는 그 역할을 제대로 충실히 수행해 낼 수 있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치 권력을 바꾼다고 한들, <귓속말> 속에서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는 '법비'들을 제대로 제어하고, 그들에게 법을 농락한 죗값을 받아낼 수 있을까.



또,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라 할 수 있는 '사법 개혁'은 실현될 수 있을까. 그리고 '법비'들에게 손쉽게 휘둘고, 돈과 권력 앞에 양심을 가볍게 내팽개치곤 하는 법조계가 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을까. 지난 18일, 대법원(산하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이 판사들의 사법개혁 관련 학술대회를 축소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는 법원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조차도 부실조사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를 보면, 여전히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이 요원한 <귓속말>의 세계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희망까지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실 속에도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신영주 같은 인물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국민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말이다. 박경수 작가에겐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부디 그의 드라마가 더 이상 통쾌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길 희망한다. 그 시작의 단초가 5월 9일 치러지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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