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너의길을가라 2013. 4. 3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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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일화(逸話)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中 -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에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주관적(subject) 폭력이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폭력'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올릴 법한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범죄,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것들 말이다. 지젝은 우리가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수레 안만 살피느라 정작 수레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의 글을 좀더 인용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폭력의 분출이 대체로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하는 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게 되면, 폭력과 싸우거나 관용을 장려하는 우리의 그 노력을 지탱하는 폭력을 실별할 수 있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범죄 '그 자체'에 집중한다. '범죄자'를 조명하고, 그가 얼마나 악랄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분노한다. 그리고 '강력한 처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깨끗하게 잊힌다. 적절한 분노는 필요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을 처벌한다고 해서 성범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곧 그와 같은, 혹은 그보다 더욱 잔혹한 범죄가 이어질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 없이,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만 제거하는 것은 하책(下策) 중의 하책일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물러서서,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살펴야 한다. 범죄 그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둘러싼, 범죄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적 현상을 읽어야 한다. 


단지, 성범죄뿐일까? 정치도 마찬가지다. 특정 정치인에, 특정 정당에, 특정한 이익에 함몰되면 '배경'을 살피기가 어렵다. '구조'를 볼 수 없고, 피상적인 사건들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휩쓸리게 되고, 균형을 잃게 된다. 어떤 사안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즉각적인 반응을 삼가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을 피해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큰 그림을 살펴야 하고,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놓여있는 맥락을 확인해야 한다. 피상적인 부분에 갇혀서, 정작 '본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부감적(俯瞰的) 사고를 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가짜 문제' 뒤에 숨어 있던 '진짜 문제'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풀어내야 할 '진짜 문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문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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