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사라지는 국어사전, 우리말이 죽고 있다

너의길을가라 2014. 7. 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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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넘겨 본 사전의 재미라니! 반짝거리는 표지, 어디를 넘겨도 빽빽하게 인쇄된 문자의 행렬, 얇은 종이의 감촉, 모든 것이 아라키를 사전의 포로로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아라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간결하게 표제어를 설명한 뜻풀이 부분이었다. 


-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 <경향신문>에서 발췌,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


어린 시절, 국어사전은 나의 완벽한 친구였다. 모르는 것이 생길 때마다 사전을 찾았다. ㄱ,ㄴ,ㄷ,ㄹ … ㅏ,ㅑ,ㅓ,ㅕ …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단어를 찾는 것이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어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건 일도 아닌 것이 되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자신감이 붙었고, 어떤 단어라도 금세 찾아낼 만큼 국어사전에 익숙해졌다. 


지금은 다소 누그러들었지만(이제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곧잘 묻는다), 고집이 세던 꼬마 시절의 나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았다. 그 궁금증을 손에 꽉 움켜쥐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사전을 폈다. 그리고 그 마법과도 같은 세계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하나를 찾으면, 다음엔 두 세가지를 찾아야 했다. 


가령, '공권력(公權力)'을 찾으면, '【법】국가 또는 공공 단체가 국민에 대하여 명령하고 강제하는 권력((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음)). □ ~을 투입하다' 라고 나온다. 이 정도면 얼핏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멈추는 것은 허용되지가 않았다. 그래선 '사전과 논다'고 할 수 없다. 이제 나에겐 '국가', '공공 단체, '명령', '강제', '권력'과 같이 사전적 의미를 확인해야 하는 단어들이 무려 5개나 더 생긴 셈이다. 



- 몇 년 전 사전의 내용을 옮겨 적어 놓았던 노트의 일부 - 


이렇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놀이 방식이 있는가 하면, 아예 첫 장부터 읽어가는 방법도 있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사전을 가득 채운 활자들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몰랐던 어휘나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어휘들이 있으면 공책에 옮겨 적기도 한다. 옮겨 적어 놓은 어휘들은 대화를 하거나 글을 적을 때, 꼭 활용을 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死典' 된 국어사전..죽어가는 민족 지혜의 심장 <세계일보>


갑자기 국어사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어제 봤던 기사 때문인데, 세계일보 특별기획취재팀은 기사의 첫머리에서 '민족 지혜의 심장'인 국어사전이 죽어가고 있다'고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취재 결과 민중서림,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교학사 등이 더 이상 새로운 국어사전을 편찬하지 않고 있고, 기존의 국어사전의 증보판도 만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더 이상 새로운 국어사전이 편찬되지 않음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되는 국어사전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2011년에는 2권, 2012년과 2013년에는 각각 1권의 국어사전만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새로운 국어사전을 만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 사전이 옮겨져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는 종이로 된 무거운 국어사전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간단히 사전을 이용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사전 어플을 사용한다. 편리함과 접근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콘텐츠 생산 기반이 허약해진다는 것이다.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나서 끊임없이 개정판과 증보판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겨나는 어휘들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사어들을 사전에 반영하기 위함이다. <세계일보>의 지적처럼 국어사전 편찬이 멈추면서 '새로 생겨나는 어휘들을 정리해 수록하고 언중(言衆)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낱말들을 추려내 고어사전으로 넘겨야 할 국어사전의 역할은 정지'되어 버렸다. 


또, '국정(國定) 국어사전'의 독점 체제도 문제다. 여러 출판사에서 각자의 기준과 방식에 따라 어휘들을 수집 · 정리 · 편집함으로써 어휘의 다양성이 보존되어 왔는데, 지금처럼 국어사전이 '국정 국어사전'으로 통일된다면 '국어(모국어)'는 그만큼 축소의 길을 걷게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모국어'라고 하는 민족의 자산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유실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이 몇 년을 넘어 수십 년 동안 이어진다면, 안상순 금성출판사 전 사서팀장의 말처럼 "(현재 웹사전은 콘텐츠를 디지털 환경에 맞게 가공해서 올려놓은 것일 뿐이어서나중에 완전히 구닥다리 사전을 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1945년 9월 옛 경성역 창고에서 발견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 -



"포학한 왜정의 억압과 곤궁한 경제의 쪼들림 가운데서, 오직 구원한 민족적 정신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원대한 문화적 의욕에 부추긴바 되어 한 자루의 모지라진 붓으로 천만가지 곤란과 싸워 온 지 열 다섯해만에 만족하지 못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었더니, 애닯도다, 험한 길은 갈수록 태산이어라, 기어이 우리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포학무도한 왜정은 기원 4275년 시월에 편찬회와 어학회와 관계된 사람 삼십여명을 검거하매, 사전 원고도 사람과 함께 흥원과 함흥으로 굴러다니며 감옥살이를 겪게됐다." 


- 조선말큰사전 머리말- 


한 나라의 국어는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담은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국어(모국어)를 잃어버린 민족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 선조들은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것이다. 그 노력의 모습들을 찾아보면, 조선어연구회(1921)는 최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하고, 우리말 쓰기를 권장했고, 조선어연구회가 개편된 조선어학회(1931)는 『우리말큰사전(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고자 애썼다.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던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회원 29명을 체호하고, 『우리말큰사전』의 원고를 몰수했다. 일본 재판부는 사전 편찬을 "조선민족 정신을 유지하려는 민족운동의 형태"라고 규정하며 국어학자 12명에게 징역을 선고했다. 이렇듯 식민지 말살 정책 속에서도 민족의 문화, 아니 민족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것이 바로 '국어사전'이다. 이제 그 '국어사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째서 새 사전 이름을 《대도해》라고 정했는지 아는가?" 

(…)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럽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글의 첫 머리에 인용했던 글은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의 한 부분이다. 『배를 엮다』는 사전 편찬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따뜻한 소설이다. 2012 서점대상 1위, 소설 부문 베스트셀로 1위에 올랐고,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행복한 사전)로도 제작됐다. 


한 권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대개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기 마련이다. 소설 속에서 《대도해》라는 사전을 만드는 데 걸린 세월만 무려 15년이다. 말이 15년이지 정말 엄청나게 긴 세월이다. 젊은 나이에 뛰어든다고 해도 중년이 되어 있을 세월이고, 중년에 시작했다면 어느덧 노년에 접어들었을 세월이다. 


게다가 그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겠는가? 《대도해》사전편집부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전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온갖 난관과 우여곡절을 뚫어냈던 것이다. 이것이 비단 소설 속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어린 시절 사용했던 국어사전 역시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리 말을 모으고 뜻풀이를 하고 정의를 내려도 사전에 진정한 의미의 완성은 없다. 한 권의 사전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말은 다시 꿈틀거리며 빠져나가서 형태를 바꿔 버린다. 사전 만들기에 참여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가볍게 비웃으며, 한 번 더 잡아 보시지 하고 도발하듯이.


-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더 이상 사전 편찬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사전 편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사전 편찬의 중요성, 우리 말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점차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적 변화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대답이다. 당장 종이로 된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처럼 여기지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국가와 민족에 큰 해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민족주의'가 불편한 분들이 있다면, 굳이 국가와 민족을 말하지 않아도 좋다. '한글'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잃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아찔한 일이 아닌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사전을 편찬하고 하는 출판사는 없다. 이러한 상황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사안이야말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말'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정부가 앞장서서 지원을 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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