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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어떻게 봐야 할까?

너의길을가라 2012. 6. 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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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 2008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인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창조적 자본주의란 결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경제연구소의 이원재 소장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빌 게이츠는 기업이 선행을 통해 더 큰 경영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소득층을 고려한 제품을 늘리고, 기부와 봉사활동을 늘리면서 경쟁력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애덤 스미스이 오류를 뒤집는다. 탐욕이 아니라 선의가 성공을 이끌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가가 부르짖은 셈이니 말이다.'


그는 주류경제학자들이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해 비이성적으로 반발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강준만 교수는 이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빌 게이츠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글에서 2007년 1월 7일『로스엔젤레스타임스』의 보도를 인용합니다.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마비 등 각종 백신의 연구개발에 그동안 2억 180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질병 퇴치에 앞장서고 있지만 4억 2300만 달러를 액슨모빌과 셰브론, 로열 더치 셸과 같은 석유회사 등 각종 공해배출 산업에 투자해 이득을 취하고 있다. 또 코노코필립스, 다우케이칼, 타이코인터내셔널 등 미국과 캐나다의 최대 공해물질 배출회사와, 환자들이 살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에이즈 약을 고가로 책정하는 제약회사들에도 투자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강준만 교수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한방을 날립니다.



- 존 록펠러 -


'사실 게이츠식 창조적 자본주의의 원조는 100여 년 전 악덕 자본가로 악명을 떨치면서 모은 돈으로 자선 사업을 펴 새로운 명예를 얻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석유왕 존 록펠러다. 록펠러가 사실상 창안한 '트러스트(trust)'와 거대 독점기업은 가격의 인위적 상승, 경젱 차단, 임금 착취 등을 초래했는데, 록펠러는 브라운 대학 학생들과 트러스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기업의 성장은 적자생존일 뿐이다. ······ 아메리칸 뷰티 장미는 그 주위에서 자라는 어린 싹들을 희생시켜야만 그 화려하고 향기로운 자태를 뽐낼 수 있다. 이는 사업에서 나쁜 게 아니다. 자연의 법칙과 신의 섭리가 작용한 결과일 뿐이다."

물론 이 원리는 오늘날에도 작동하고 있으며, 게이츠에 의해 창조적 자본주의로 미화되고 있다. 100년이라는 시차만 있을 뿐 게이츠는 카네기와 록펠러의 환생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즉,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미국적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 의견에 조금 더 고개가 끄덕여지시나요? 이룰 것을 다 이룬 한 기업가의 자기만족일까요, 탐욕에 찌든 자본주의가 나아갈 새로운 길일까요? 이중적인 작태에 분노를 느끼시나요, 그래도 저만큼이라도 하는 게 아니냐고 위안을 삼으시나요?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한 이원재 소장의 풀이를 믿고 싶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사회적 기업이 더욱 많아져서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다만, 강준만의 염려도 공감합니다.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듣기 좋은 이름 뒤에서 자신들의 탐욕을 숨긴 채 또 다른 탐욕을 향해 나아가는 기업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에 대한 감시의 눈길도 지속되어야 할 겁니다. 결론은 '선의', '협동', '협업', '사회적 책임', '신뢰'입니다. 이런 가치들이 더욱 존중받은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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