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여행기

[버락킴의 파리 여행기] 10. 파리의 지하철 문은 수동이라고?

너의길을가라 2017. 1. 2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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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걷고 또 걷는다

새벽 그대 떠난 길 지나 

아침은 다시 밝아오겠지

푸르른 새벽 길


- 전인권, 「걷고 걷고」 중에서 -


너무 걷는 이야기만 했나보다. 파리를 여행하는 내내 줄곧 걷기만 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많이 걸었던 건 사실이지만, 걷기만 했던 건 당연히 아니다. 파리에서 가장 많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지하철'이었다. 딱히 파리가 아니더라도 '도시'로 여행을 가게 되면 그 곳의 지하철 노선부터 확인하고, 그 위에 들리고 싶은 곳들을 적어둔다. (파리교통공사 http://www.ratp.fr/) 



지하철이 매력적인 까닭은 도시의 구석구석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는 점과 지하철 역에서 주요한 장소들로 이동하기 수월하다는 점이다. 또, 이동시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여행 동선을 짜는 데도 지하철 노선은 좋은 지침이 된다. 가령,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가려면 '아베쎄 역'을 기점으로 삼으면 되고, 개선문에 가려면 '샤를 드 골 에투알 역'에서 내리면 된다. 간편하다.


물론 단점도 있다. 이동하면서 바깥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것 정도? 그럴 때는 '사람'들을 구경하면 된다. 파리에는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머리색'도 다양하다. 그 다채로움 속에 있노라면 '민족주의'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세계 시민'이라는 자각이 든다. 아, 파리의 지하철에선 '냄새'가 더러 나기도 한다. 아무래도 시설이 오래됐기 때문일까.



파리의 지하철 노선은 총 14호선(독립 지선까지 포함하면 16개 노선)으로 이뤄져 있는데 파리 만국박람회가 개최되던 1900년에 개통됐다. 그리고 고속 교외 철도인 RER(Réseau Express Régional)이 A선부터 E선까지, 트램(TRAM)이 A선부터 C선까지 구축돼 있다. RER은 1977년 파리 시내의 지하철과 지선 철도를 통합해 만들어 졌는데, B선은 샤를드골 공항까지 연결돼 있고, C선은 베르사유로 이어져 있다. 


아, 티켓을 구입하는 방법부터 알아보자. 전혀 어렵지 않다. 'Tikets'라고 쓰여 있는 기계를 찾아 순서대로 화면을 터치하면 된다. 'Tiket t+'을 선택하면 1장씩 낱개로 구입할 건지, 10개 혹은 20개씩 묶음으로 구매할 것인지 고르게 된다. 1장이 1.9 유로이고, 10장이 14.5 유로이므로 묶음으로 사는 게 훨씬 유리하다. 만약 하루에 4번 이상 지하철을 탈 예정이라면 Mobilis(1일 권)을 구입하는 게 이득이다. 


손잡이 식 수동문(위)과 버튼 식 수동문(아래) -


사실 지하철 이야기를 시작한 까닭은 다른 데 있다. '문(door)'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던 둘째 날, 숙소 근처의 '뒤플렉스' 역 플램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파리의 지하철 역은 이런 느낌이구나?'라며 감상에 빠져 있는데, 드디어 열차가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맨앞에 서 있던 사람이 다짜고짜 문에 달린 손잡이 같은 걸 잡고 돌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열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다 '컬쳐쇼크'를 느꼈다. 당연히 자동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뭔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뭐지? 왜 수동이야, 불편하게?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동으로 열리면 굳이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저들은 왜 이런 불편함을 감내하고 있는 걸까.



문이 '수동'이다보니 열차의 문은 량(輛)마다 개별적으로 작동했고, 승하차할 사람이 없는 역에선 당연히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난방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체 열차의 문이 함께 개방됐다가 닫히는 서울의 지하철과는 전혀 다른 양태였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독일에서도 지하철 문이 수동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손으로 열고 닫아야 한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자동이 편리한 건 두 말 하면 잔소리지만, 고장의 위험성이 더 높다. 수동문은 고장의 우려가 없기 때문에 이를 운용하기 위한 별도의 인력도 필요 없게 된다. 이야기를 좀더 진전시켜보면, 그리되면 2016년 5월 28일 구의역에서 발생했던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처럼, 19세 수리공이 안전문에 끼어죽는 사고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게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일자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무조건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회는 결국 '착취'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눈앞의 불편함을 다른 누군가에게로 전가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편함은 '고통'이 돼 우리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우리가 돈과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재벌 3세가 아닌 한 말이다. 


- 물론 파리에도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역이 있다 -


총체적 난국이었다. <한겨레>는 저 안타까운 '19세 수리공 죽음'의 구조적 원인을 4가지로 분석했는데, 첫 번째는 묻지마 외주화, 두 번째는 인력 쥐어짜기(2인 1조가 원칙이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세 번째는 '헐값'에 청년 부리기, 네 번째는 원청의 '갑질'... 낙하산 · 임금차별을 꼽았다. (<한겨레>, 스크린도어 고장 연 1만여건 '월 140만원 청년' 돌려막기) 안전보다 '비용절감'이 우선시되다보니 발생하는 '필연적' 비극이라 할 만 했다. 


얼마 전 서울메트로에 직고용된 안전업무직 노동자들의 보수 수준이 나아졌다(애초에 약속했던 액수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는 기사를 읽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이후 민간위탁업체(은성PSD)에 외주를 줬던 구조를 개선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 제법 많은 것들이 바뀐 셈이지만, 여전히 '불안의 씨앗'은 우리 사회 안에 잠재돼 있다.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눈앞에서 '제거'하려고 하는 사회 분위기가 변화하지 않는 한, 내가 좀더 편리해지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전가하는 우리들의 이기심이 깨지지 않는 한, '착취'의 최전선에 서 있는 누군가는 또 다시 불합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악순환을 이대로 지켜보는 건, 또 다시 무슨 사건이 터진 후에야 수습하려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갑자기 '자동문'을 '수동문'으로 바꿀 순 없겠지만, 아직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는 '불편함'들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사고의 전환을 해보는 건 어떨까. 파리 지하철의 '수동문'이 제법 무거운 숙제를 던져준 느낌이다. 문득 다시 그 손잡이를 젖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거, 제법 손맛이 좋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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