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이재명과 홍준표, 공공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얼굴

너의길을가라 2015. 3.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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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사회적 기능들을 경제적 계산에 종속시킵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공공서비스에 생존력 지표들을 도입했습니다. 공공서비스가 마치 사기업이나 되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교욱, 건강, 사회보장, 고용, 과학 연구, 공공서비스, 안전 등의 분야들을 경제적 분석표에 따라 관리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책임을 없애버리고 국가가 전통적인 권한들을 포기하게 만듦으로써 그러한 권한들을 점차 민영화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 카를로 보르도니, 『위기의 국가』-

 

ⓒ SBS

 

 

'공공성(公共性) 강화'

 

이 시대의 화두를 하나 꼽자면, 그건 바로 공공서비스의 강화에 대한 시민들의 강한 요구가 아닐까?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을 뜻하는 '공공성'은 흔히 '민영화(民營化)'의 반대말로 쓰이지만, 오히려 더 적합한 표현은 사유화(私有化)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세계는 규제완화, 민영화, 감세를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광풍(狂風)에 휩쓸렸다.

 

공공성은 처참히 훼손됐고, 민영화라는 이름의 개인의 사유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시장주의자들이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시장질서는 무너졌고, 자본주의도 훼손됐다. 사회의 불안정성은 증폭됐고, 불평등은 사람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2008년에 발생한 세계 경제 위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2008년 9월과 10월은 대공황을 포함, 세계 역사에서 최악의 금융 위기였다"고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고백한 것처럼, 더 이상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사라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논의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여전히 신자유주의는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좌우(혹은 진보와 보수)의 절충점은 병든 자본주의를 고쳐 써야 한다는 방향으로 모아졌고, 그러기 위해서 신자유주의로 인해 훼손된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시장에 넘어간 권력을 국가가 되찾는 정치의 복원이 있어야 한다", "사적 영역의 과대 팽창을 막고 공적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시장의 불공정성을 시정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고 경제적 약자의 교섭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시장에 넘어간 권력을 무슨 수로 국가가 다시 되찾는다는 말인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국가가 강력한 시장에 맞서, 공적 영역을 확대하고 불공정성을 시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재의 위기를 '권력과 정치의 분리에서 기인하는 것'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앞선 시기에 출현했던 위기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권력 상실은 경제 정책의 약화를 낳고, 이는 공공서비스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국가가 기능의 상당수는 시장 세력들에게 '외주를 주고' 극소수의 기능들은 '생활 정치'에 보조화되면서 시민들의 생활 조건에 대한 여러 위협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정부의 역량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정당이, 혹은 저 정당이 시험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 정책의 변화는 최소에 그칠 뿐이고 극도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생존경쟁을 하는 데 따르는 고통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계속 쌓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민이 수여한 신임장이 갈가리 찢기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체제입니다. 이제 시민들은 정부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 카를로 보르도니, 『위기의 국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훨씬 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 있는 대한민국에는 반전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시민들이 국가에 대한 믿음을 잃기 전에, 공공성을 회복하고 공적 영역을 점차적으로 늘려가야 한다. 경제적 약자를 비롯한 불안에 노출된 시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영향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공공성 강화'라는 화두를 놓고 봤을 때,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지자체가 있다. 바로 경남도와 성남시다. 무상급식 중단으로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교복도 무상, 책가방도 무상, 모든 걸 무상 시리즈로 가려고 하면 아마 국가재정은 파탄이 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재명 성남시장은 출산 여성의 산후조리를 무상 지원하고, 나아가 무상 교복(중학생)까지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예산 낭비를 줄이고 불요불급한 사업의 조정을 통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장의 기본 입장이다.

 

지난 16일, 이재명 성남시장은 무상 공공산후조리원 설치와 민간 산후조리비 이용료 등 산후조리비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무상 공공산후조리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경기도 성남시의회는 25일 무상 산후조리 지원 조례를 통과시켰다. 새누리당의 반대(표결 불참)가 있었지만,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은 표결을 통해 이 시장의 공약 사업이기도 했던 무상 산후조리 조례를 밀어붙였다.

 

 

조례를 통과했다고 해서 곧바로 무상 산후조리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보장기본법 제26조(협의 및 조정) 제2항에는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사회보장제도를 신설하거나 변경할 경우 신설 또는 변경의 타당성, 기존 제도와의 관계, 사회보장 전달체계에 미치는 영향 및 운영방안 등에 대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보건복지부장관과 협의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무상 산후조리가 제도화(制度化) 되기 위해선  보건복지부와의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통과 여부가 불확실하다. 위기에 처한 국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신자유주의 노선에 심취하여 외골수 기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현 정부에서 '공공성의 강화'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은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에서는 공공성의 약화를 상징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에 박수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혹자는 이 사안들을 단지 '비용'의 문제로 국한시키고자 할 것이다. 물론 공공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돈이 들어가게 되고,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세금을 더 걷는다든지)는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용'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 핵심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좋은 변명거리가 될 뿐이다.

 

그 변명은 "제가 마른 수건인 줄 알고 쥐어짰더니 젖은 수건이더라"는 이재명 시장의 반격으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다. "부정비리, 예산 낭비, 국가도 엄청나게 예산 낭비하잖나? '사자방'으로 뿌리기도 하는데…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보도블록 마구 갈아 끼우고, 도로 멀쩡한 걸 다 갈아엎고, 불필요한, 급하지도 않은 토목공사 대규모로 하고…" 이렇게 새어나가고 낭비되는 예산만 잡아내도 무상 산후조리나 무상급식 같은 저렴한(?) 공공서비스는 충분히 실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비용은 부차적인 논점일 뿐, 핵심은 '공공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바로 철학의 차이다. 주어진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의지와 철학의 문제다. 이는 국가(혹은 지자체)의 역할을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오게 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이대로 국가의 역할들을 끊임없이 '외주에 넘기고' 나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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