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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추모, 우리는 배우 김지영을 모른 채 그를 보내야 했다

너의길을가라 2017. 3. 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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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한 길만 걷고 연기만 했다는 표적으로 손도장도 찍고 싶고.. 그런데 그런 꿈을 언제 이루겠어요. 그래서 그냥 현재로 만족해요. 현재로 만족하고 열심히 하다가 가는 날까지.." (2006년 KBS2 <주간연예수첩>)


지난 2월 19일, 폐암 투병 중이었던 원로배우 김지영(1938~2017)이 세상을 떠났다. 연기 외길만 걸어왔던 그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연기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MBC <여자를 울려>, JTBC <판타스틱>은 그가 투병을 하면서 촬영에 임했던 작품들이었다. 연기에 대한 오롯한 사랑 그리고 투혼이 새삼 놀랍다. 향년 79세, 평생 연기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에게도, 여전히 그의 연기가 보고 싶은 대중들에게도 너무나 짧은 삶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배우 김지영'을 모른다. 물론, 그의 '이름' 석 자와 '얼굴'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겠는가. 1958년 연극배우로 데뷔했던 김지영은 1965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상속자들>로 스크린에 모습을 비췄다. 이후 김수용 감독의 작품에 계속해서 출연하게 됐고,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 <아다다>(1987) 등에 출연하는 등 인상적인 조연 배우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TV로 활동을 이어갔는데, KBS2 <장밋빛 인생>, MBC <그대 없인 못살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왜 나는 배우 김지영을 모른다고 하는가. 포털 사이트 DAUM에 '김지영'이라는 이름을 넣고 검색하면, 그가 출연한 작품만 157편(영화 103, TV 54)이다. 어떤 기사에는 그가 출연한 영화 작품만 250여 편이라고도 한다. 과거의 작품들 중 기록이 되지 않은 것도 제법 되는 모양이다. 작품 목록을 쭉 훑어나가보니, 알고 있는 작품이 상당수가 된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작품들 속에서 배우 김지영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캐릭터' 혹은 '대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송구스러운 마음을 안고, 그의 '배역'을 천천히 살펴봤다. '영광 어머니 역', '할머니 역', 이모 역', 서주 고모 역'... '이름'이 없었다. 대부분 그러했다. (물론 <장밋빛 인생>에서 맡았던 '미스봉' 역은 분명한 캐릭터를 갖고 있는 역할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매번 '누군가'의 '무엇'이어야만 했다. 물론 하나의 작품에서 '조연'은 필수적인 존재다. 작품을 원활히 흘러가도록 만드는 '윤활유'라고 할까. 당연히 주인공의 할머니, 엄마, 이모, 고모는 필요하다. 문제는 그 캐릭터에 '역할'이 존재하느냐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김지영은 사투리 구사력에 있어 탁월한 배우였다. 극의 사실성을 월등히 높이기에 그는 중용받을 수 있었다. 지방 촬영을 다니며 홀로 연습을 하는 건 당연했고, 사투리를 배우기 위해 개인 레슨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실력이 오죽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그는 언젠가부터 '정감가고 친근한' 할머니(고모, 이모, 엄마) 또는 '억척스러운' 할머니 역에 묶여버리게 됐다. 팔도 사투리를 그보다 완벽하게 구사하는 또래 배우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맛깔스러운 사투리 연기, 팔색조 같은 연기. 그것은 분명 배우 김지영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아쉬운 마음이 든다. 분명 그는 훨씬 더 깊은 연기 내공을 지닌 배우였다. 내면에 훨씬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배우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는 배우 김지영에 대해 잘 몰랐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김지영을 더욱 발견하지 못한 채, 기존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급급했던 일선의 감독과 작가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어째서 우리는 배우 김지영을 더 궁금해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늙지 않는다. 성숙해질 뿐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더 특별하고 아름답게 여겨진다." (박원숙)


그런 의미에서 제2의 <디어 마이 프렌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노희경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좋은 작품은 이미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번엔 어른들을 관찰하고 싶었다."며 황혼 청춘들의 인생 찬가를 멋드러지게 그려냈다. 김혜자, 나문희, 윤여정, 박원숙, 고두심, 신구, 주현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은 노희경이 써준 '글' 속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아왔던 원숙한 연기 내공을 몽땅 꺼내 보였다. 마음껏 연기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그들에겐 '이름'이 있었고, 저마다의 '역할'이 있었다. '해석'의 여지가 있었기에 배우들은 '고민'을 해야 했다. 부여받은 캐릭터 속에 '연기'를 담아냈다. 그들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라마를 통해 역력히 드러났다. '만약 김지영이 <디어 마이 프렌즈>에 출연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더 이상 그런 작품이 그려지기 힘든 것이 현실이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노희경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은 『나이 드는 법』에서 "'활기 차게 나이 들다!' 나쁘지 않은 좌우명이다."라고 말한다. 분명 김지영은 활기 차게 나이 드는 법을 알고 있었던 배우이자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활기 차게 나이드는 그 배우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 아,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 채 보내야만 했다. 더 이상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본다. 뒤늦은 추모가 부끄럽고 또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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