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기본소득제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두 가지

너의길을가라 2014. 6. 2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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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6월 호에 홍준기 프로이트 라캉 정신분석연구소 소장의 '무비판적 담론이 '지젝' 환상 키워'라는 글이 실렸다. 홍준기는 이 글을 통해 '들뢰즈-네그리류의 신좌파 공산주의(혹은 코뮨주의), 그리고 요즘 많이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기본소득론'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챙겨 봤는데, 초반 부분은 다소 학술적인 내용(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이고, 기본소득론을 다루고 있는 후반부도 좌파 간의 진영 논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내용을 모두 꼼꼼하게 인용하고 논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홍준기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기본소득론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신자유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핵심적인 논지와 더불어 그가 제시하는 기본소득론에 대한 비판 몇 가지만 빌려오고자 한다. 자, 차근차근 시작해보도록 하자.



우선, 기본소득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전의 글을 통해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역시 기본소득네트워크 대표인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의 언어로 설명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가 강남훈 교소(와 곽노완 교수)를 인터뷰(2013년 12월 6일 )했던 내용을 옮겨봤다. 


Q. 기본소득이 뭔가요? 


강남훈 - 국민에게 1인당 일정한 소득을 지원을 하자는 거예요. 보통 세가지 원칙을 이야기해요. 첫째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무조건 주자. 두번째 개별적으로 주자. 그 동안 복지가 주로 가족단위로 지급했잖아요. 미성년이면 조금 적게 주고 열두살 이하면 부모에게 지급하자는 생각이지만 개인에게 줍니다. 세번째로는 대가 없이 주자. 취업학원에 다녀라, 정부에서 주는 일자리는 무조건 해라, 그런 조건을 다는 게 아니라 무조건 주자는 겁니다. 일부 지역 일부 연령층에서 하고 있지만 무상급식 같은 현물급여도 기본소득으로 봅니다.


준비운동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기본소득제(혹은 기본소득론)는 더 이상 확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 언론을 타기만 하면 뜨거운 논쟁거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진보적인 언론 등에서 꽤나 비중 있게 다뤘음에도 '그들만의 논쟁'에 그치고 있다. 아, 진보적인 언론에서만 다뤄서 그런 걸까? 어쨌든 논쟁은 '좌파 내부의 논쟁'에 머물러 있는데, 이른바 '보편복지론자 VS 기본소득론자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기대했던 것과 같은 '좌파 VS 우파' 혹은 '진보 VS 보수'의 대격돌은 없었다. <오마이뉴스>는 이번 6 · 4 지방선거에서 '기본소득제'를 선거 이슈로 밀고자 했지만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우파(혹은 보수) 지식인이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주요한 이유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기본소득제에 우파(혹은 보수) 쪽에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차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냥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거지, 뭐" 정도의 분위기랄까. 이대로 기본소득제의 불씨는 사그라드는 것일까? 


이대로 '기본소득제'를 서랍 속에 집어 넣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편복지론자 VS 기본소득론자의 논쟁'을 정리하면서 한 번 더 '기본소득제'를 언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소 비판적인 어조가 되겠지만, 만약 기본소득론자들이 그들에게 제기되는 근본적인 물음들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기본소득제'는 서랍 속에 스스로 기어 들어가야 할 것이기에 부담없이 쓰고자 한다.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론자들을 두고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고 비판한다. 홍세화가 말하듯,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나친 이상주의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한편,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보편복지론자들에게 너희들이 말하는 그 보편복지는 결국 '불안정 노동이 만연한 현대 시장경제에서 보편복지 역시 이들을 방치하는 노동 연계 선별복지'라고 비판한다. 


우선, 필자는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주장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기본소득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그러하다. 무엇이든 실현되기 전까지는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법이다. 불과 10년 전을 떠올려보라. 당시에는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이 한 두 가지인가?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이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비판은 고작 '실현 가능성' 따위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본소득제의 치명적인 약점은 (큰 줄기로)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기본소득제가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강화시킨다는 위험론이고, 두 번째는 노동의 신성성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분노다. 전자는 좌파 내부의 이론적 논쟁이고, 후자는 기본소득제를 바라보는 좌파 너머의 일반 시민들의 시선(윤리적 문제)이다. 


홍준기는 '무상의료나 교육 등 전통적인 사민주의 정책은커녕 신자유주의적 국가 수준의 복지도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빈부격차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는 대한민국에서 기본소득제가 시행된다면 오히려 반가워할 사람은 신자유주의자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인 복지 체계조차 갖춰지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기본소득제'에 올인될 경우에 생길 부작용은 상상 그 이상일 수 있다. 또, 기본소득으로 제공된 돈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호주머니에 들어갈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 대한민국이야말로 '소비를 위한 사회'가 아니던가?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그러면서 그는 기본소득제야 말로 신좌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이 결합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자유주의자들 중에서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원조인 밀턴 프리드먼이다. 신좌파와 (신)자유주의자의 결합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이처럼 기본소득제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실상 '탈이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일본의 대표적 우익인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도 '기본소득제'를 주창한 바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를 극복 혹은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좌파와 진보의 모순을 지적한 부분은 뼈아프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관철되어 봐야 여전히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라는 홍준기의 지적에 대해 기본소득론자들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당장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깟 신자유주의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 무슨 소용이냐고 감성적인 접근을 하진 않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보편복지의 실현'에 초점을 맞춰나가자고 말한다면 그때는 뭐라고 대답할까?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이것이 좌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론적 논쟁이라면, 좌파 너머의 시각은 단순하면서도 극복하기 더욱 어려운 '윤리적 문제'를 담고 있다. 벌써 세 번째 인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 한 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마이클 센델의 『도덕이란 무엇인가』의 한 부분인데,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복지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 중 이보다 명징한 것은 없어 보인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복지에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회복지에 소비되는 돈을 아깝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보상을 수여하는 기준과 관련해 사회복지에 담긴 메시지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베풂'을 근거로 사회복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바로 그 점을 간과할 때가 많다. 소득이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시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의 척도 역할까지 한다.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이 흘리는 땀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진다. 물론 사회복지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가 공정성과 자격, 의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른바 '무위도식'에 대한 선량한 노동자들의 분노,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발탈감 혹은 모멸감을 기본소득론자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작(?) 사회복지에 대해서도 떨떠름한 사람들을 무슨 수로 설득시킬 수 있을까? 홍세화는 이에 대한 답으로 '이웃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공동성의 발견'을 제시한다. 과연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혹시 그의 '근원적인 물음'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에 대한 문제제기는, 또 하나의 복지정책(전략)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와 인간성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라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 그 자체로 삶을 존엄하게 영위할 권리를 가지며, 사회와 국가는 어떤 조건도 없이 이 영토에 존재하는 모든 개인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름 아닌 잔혹성의 한계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체제와 이 체제가 강제하는 삶의 공포 앞에 짓눌린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의 형식을 발명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는 질문"


홍세화, 『한겨레』,「박근혜 정권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③─이제 '기본소득제'를 외치고 쟁취할 때다」


기본소득제를 주장하거나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흔한 논쟁은 '재원'과 '비용' 등 경제적 실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 쪽은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고 하고, 한 쪽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또, 한 쪽은 기본소득제가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기본 소득을 위해 필요한 정책수단 비용 막대(오건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런 논쟁은 소모적인 것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것도 아니다. 국회 내에서 새어나가고 있는 돈의 천문학적 액수를 보라. '재원'과 '비용'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녹색평론> 김종철 역시 '기본소득 도입을 가로막는 최대 장벽'이 재원을 어디서 마련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고정관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마이클 센델이 던진 물음과 맞닿아 있다. 김종철은 이에 대한 해답을 '배당금'의 개념에서 찾고 있다. "(토머스 페인의 논리에 의거하여), '기본소득'을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든 마땅한 권리로 주어져야 할 '배당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공유지'의 개념을 상기하면서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아무 조건 없이 기초생활비를 지급하는 이 방안은, 기왕의 시장논리를 존중하면서, 대다수 민중에게 그들의 잃어버린 생존 기반, 즉 '공유지'를 되돌려주고 '도덕경제'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물음표는 되돌아 왔다. 김종철의 말처럼 기본소득제는 '기왕의 시장논리를 존중'하는 대안이다. 좌파 진영에서 지적하는 본소득제가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강화시킨다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셈이다. 


'기본소득제'는 우선, 좌파 내부의 논쟁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또, '너무 이상적이야'라고 말하는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복지국가 체계가 갖춰진 이후에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보편복지론자들이 제기하는 시기상조론(혹은 순서론)도 치명적이다. 이러한 내부적 논쟁이 정리되야만, 기본소득제는 제대로 된 건곤일척을 벌일 수 있는 힘,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DNA에 각인되다시피한 '노동의 신성성'이라고 하는 문제, 그 윤리적 문제를 돌파하는 것은 좌파 내부의 논쟁을 돌파하는 것보다 수 백 수 천 배는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본소득론자들에게 그만큼의 역량과 힘(지구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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