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레전드 오브 타잔>, 정말 타잔은 탐욕에 맞서 싸웠는가?

너의길을가라 2016. 7. 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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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액션/모험

국가 : 미국

감독 : 데이빗 예이츠

제작/배급 :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런닝타임 : 109분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줄거리 : 밀림의 전설, 타잔이 돌아왔다! 8년 전, 아프리카 밀림을 떠나 이제는 런던 도심에서 사랑하는 제인과 함께 문명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한 타잔. 하지만 탐욕에 휩싸인 인간들은 그를 다시 밀림으로 불러들이는 데… 사랑하는 아내 제인과 밀림을 지키기 위해 타잔, 그가 이제 인간에게 맞선다!



'정글'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동물들과 함께 자라고 살아온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차례로 개봉해 관객들을 만났다. 인간의 '아이' 모글리를 앞세운 <정글북>이 언뜻 보기에 탈(脫)정치적이면서도 제국주의적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다면, <레전드 오브 타잔>은 정글의 왕 '타잔'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지극히 정치적인 색채를 유지하는 '듯' 보인다.


'흰 피부'라는 뜻의 '타잔'은 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의 『유인원 타잔(1912)』이라는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로, 소설의 성공 이후 영화를 비롯한 TV 시리즈 등으로 줄기차게 제작된 단골 고객이었다. '타잔'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만 100여 편이고, TV 시리즈 및 비디오를 포함하는 300여 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타잔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타잔의 활약은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나무를 타며 밀림 속을 종횡무진 누비듯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밀림 밖 세계를 누볐다. 그만큼 인지도와 대중성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한 '캐릭터'인 만큼 <레전드 오브 타잔>의 제작진 입장에서 그 '친숙함'은 독(毒)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레전드 오브 타잔>의 과제는 '익숙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영리하게도 <레전드 오브 타잔>은 과감한 '재해석'을 선택했다. 밀림 속의 타잔이 아니라 밀림을 벗어나 문명 세계에 편입된 타잔을 통해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다. 영국의 귀족 그레이스토크 5대 백작이자 상원의원인 타잔의 본명은 존 클레이턴(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이다. 그는 대저택에 살면서 하인과 하녀를 거느리고, 양복을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채 우아하게 살아간다. 이제 '타잔'은 없는 것일까? 그는 정글을 다 잊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내면 속에 잠재된 '본능'은 없어지는 게 아니란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의 제안에도 "더워서 싫다"더 거절했던 타잔은 미국인 외교관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사무엘 L. 잭슨)에게 설득당해 결국 자신의 '고향' 콩고로 향한다. 레오폴드 왕이 식민지 콩고에서 저지르고 있는 인권유린의 실태를 파악하고 세상에 고발해야 한다는 윌리엄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타잔은 레오폴드 왕이 밀림 개발을 위해 콩고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이용해 콩고의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려 했던 롬(크리스토프 왈츠)의 계략을 알아채게 되고, 이에 맞서 '쿠바'와 '정글'을 규합해 함께 싸워나간다. <레전드 오브 타잔>이 선택한 재해석이 '영리'하다고 평가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기존의 타잔이 백인 우월주의(백인인 타잔이 정글을 지배하고 왕으로 군림한다),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연상시켜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됐던 것을 뒤집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통쾌한 전복(顚覆)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영웅으로 돌아온 '타잔'은 무겁고 진지하다. 또,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들여다보면' 타잔에겐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도, 그에 대한 반감도 부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제인(마고 로비)이 납치당한 것에 격렬히 '분노'할 뿐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의지 그 이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도에 자를 대고 줄을 그어가면서 아프리카를 침탈했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타잔'의 몫이 아니다.



<레전드 오브 타잔>은 비판의 몫을 '윌리엄스'에게 던져줬다. 적절하게도(?) 그는 '흑인'이고, '인디언 소탕전'에 참여했다. '먹고 살기 위해' 인디언 소탕에 나섰던 윌리엄스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고 자책한다. 그의 '자백(自白)'은 '타잔'이라는 캐릭터에 잔존해 있던 '불편함'을 희석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더불어 밀림으로 돌아가 육탄전을 벌이는 타잔의 어깨에 '정치적 올바름'을 입히기도 한다. '타잔은 과연 서구 제국주의와 탐욕에 맞서 싸우고 있구나!'


그러나 여전히 영화 속의 원주민들은 '백인'인 '타잔'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레오폴드 왕'이라는 '악인'의 개별적인 잘못일 뿐이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선봉이었던 영국과 그 바통을 이어받았던 미국의 제국에 대한 열망은 가볍게 면죄부를 받은 느낌이다. '재해석'을 선택했지만, 그 영리함 속에 진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우리는 이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정말 '타잔'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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