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도깨비>의 삼신할매가 '탄핵은 음모'라는 곽일천 교장을 만난다면?

너의길을가라 2017. 2. 1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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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부끄럽지만 뒤늦은 고백을 해보자. tvN <도깨비>를 만난 모든 날들이 좋았고, <도깨비>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눈부셨다. '고작' 드라마일 뿐인데도 그저 속도 없이 좋았고, 그리하여 참으로 퍽 난감하였다. 비록 <도깨비>는 종영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하니까)의 심장은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첫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공유, 김고은, 이동욱, 유인나. 육성재, 조우진, 김민재, 김소현, 김병철, 박경혜.. 정말이지 모두가 좋았다.



이처럼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지만,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와 배우)를 꼽으라면 '삼신할매' 역을 맡았던 이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꼬부랑 할머니가 아니라 강렬한 레드 정장을 입은 섹시함 가득한 삼신할매라니! 기존의 틀을 깨버린 김은숙의 창의적 발상과 이를 100% 소화한 이엘의 매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또, 어느 장면 하나 빠뜨릴 수 없지만, 그 가운데 가장 전율스러웠던 장면을 꼽으라면 삼신할매의 잊을 수 없는 한마디(11회)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은탁(김고은)의 졸업식 날이었다. 부모들이 교실로 들어와 자녀들과 기쁨을 나누는 동안 그는 쓸쓸히 홀로 앉아 있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의 삼신할매가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걸어와 지은탁에게 목화꽃 다발을 안긴다. "잘 컸다. 엄마가 기뻐하실 거야." 그리고 온갖 상스러운 말과 해코지로 지은탁을 못살게 굴었던 담임 선생에게 다가가더니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이 한마디에 담임 선생은 대성통곡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왜, 뜬금없이 <도깨비> 이야기냐고? 그것도 왜 갑자기 삼신할매 타령이냐고? 왜냐하면 지난 7일 열린 서울디지텍고등학교의 종업식(終業式)에서 곽일천 교장이 벌인 촌극 때문이다. 그날 곽 교장은 학생들을 모아두고 '탄핵정국에 대한 교장선생님과 학생들의 토론회'라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약 50여 분 동안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정치적 음모"라는 주장을 늘어놨다. 반면, 학생들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걸 어찌 '토론'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참다 못한 1학년 여학생이 발언권의 비평등성을 지적하자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답변하는 아스트랄함이라니.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토론을 해본 적 없는 것 같다'고 지적하며,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그런 형태를 토론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고 말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발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동영상을 확인한 서울시 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절대 토론회의 형식이라고 할 수 없는 단순한 훈화시간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곽 교장은 "탄핵 사건을 처리하는 우리 사회는 정의로움이 사라졌거나 부족하다. 지극히 법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하고 있다.", "언론도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자기의 정략적 의견과 허위사실을 말하면서 사회를 선동시키고 있다."면서 탄핵 당한 박근혜 대통령을 비호하는 데 온힘을 다 쏟았다. 게다가 태블릿PC가 최순실의 것이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찌라시'의 억지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꼴이 아닌가. 학생들이 반론을 제기하자 더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을 변호하는 데 열을 올렸다. 교육자라고 하기엔 한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논란이 점차 확산되자 곽 교장은 13일 해명에 나섰다. "한 사회과학자로서 그리고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장으로서 학생들이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이를 균형 잡도록 해 주는 교육의 기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지만, 당시의 동영상과 기사를 통해 밝혀진 곽 교장의 생각이야말로 어느 한쪽에 완전히 치우쳐 있지 않았던가? 또, 그의 주장과 이야기 방식은 그저 일방적인 강요에 지나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과학자, 그리고 교육자의 민낯은 이처럼 해괴망측한 것이다. 


게다가 해명에서조차 "토론회의 핵심은 최근의 탄핵 사태가 과거 광우병 파동이나 미군 장갑차 사건처럼 비이성적이고 잘못된 정보에 의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학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만 봐도 그가 지극히 편한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교육청은 곽 교장을 상대로 진상 파악에 나섰고, 본격적인 조사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자 학교의 사실상 소유자인 그가 이를 두려워 할지는 의문이다. 



<도깨비> 속 삼신할매가 현실에도 존재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그렇다면 서울디지텍고등학교의 종업식 현장에도 분명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시선을 압도하는 레드 정장을 입은 삼신할매, 이엘은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곽 교장 앞에 다가갔을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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