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나의 산티아고>, 791km의 고된 여정 속에서 나를 만나는 개별적 경험

너의길을가라 2016. 7. 2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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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km(정확히는 781km)에 이르는 고된 순례길을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대며 걷는 하페(데비드 스트리에소브)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산책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의 산티아고> 티켓을 예매했다. "요즘 시대에 신을 찾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결코 '무게'를 잡지 않는 이 영화를 만나는 데 굳이 거드름을 피울 이유도, 긴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신을 찾아 떠나는 그 여정에 '동참'하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했다.



예상대로 비어 있는 좌석이 훨씬 많았다. 관객은 듬성듬성 널찍하게 앉아 있었다. 통로 쪽에 자리잡은 중년의 남성은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나의 산티아고>는 그런 영화였다. 신을 만나러 가는 42일 간의 길고 고독한 여정. 고작 15%만이 목적지인 산티아고까지 도달한다. 하나의 주어진 길을 순례자들은 개별적으로 경험한다. 각자의 질문과 각자의 대답을 통해서 말이다. 어쩌면 코를 골던 그 중년의 남성도 그만의 방식으로 신을 만났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신이 존재하는지를 묻기 위해' <곡성> 과 같은 영화를 만든다. 저 선량한 피해자들의 속절없는 죽음 앞에 '신이시여, 당신은 정말 존재하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피를 토하듯 따져 묻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밀양> 같은 영화를 통해 '용서와 구원'이라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나의 산티아고> 같은 영화 속에서 찾아 나선다. 우리가 그토록 얻고 싶은 답인 '신'을 말이다. 



"이 길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다시 일으켜 세운다"


과로로 인해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 상태에 빠진 인기 코미디언 하페는 의사로부터 '휴식'을 가져야 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텅 비어버린 자신을 채우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지쳐갈 뿐이다. 무기력 속에서 하루를 태워버리던 어느 날 TV 속에서 "요즘 시대에 신을 찾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오래 전에 '놓아버렸던' 그 질문을 마주한 하페는 그 길로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경쾌하다. 엄숙하리라 생각했던, 혹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순례길을 주인공 하페는 '꼭 그래야 할 이유가 뭐야?'라고 되묻듯 가볍게 걸어나간다. '순례'도 결국 여행의 일종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나의 산타아고>는 고된 여행 속에서 내면의 성숙을 이뤄가는 하페의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문자답(自問自答) 속에서 하페가 '나'를 만나는 장면은 가슴 먹먹한 감동을 준다.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두고 '가볍고 경박하다'고 냉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하페가 신을 만나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 대해 '전혀 공감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사실 그 비공감은 지극히 당연하다. 신을 마주하는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은 철저히 개별적이다. 하퍼는 벽에 낙서처럼 쓰여진 '나와 너'라는 글씨에서 신을 찾았다. 어떤 이는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달했을 때 신을 만났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불행히도 끝끝내 신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침묵은 쉽지만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791km, 42일 간의 여정을 홀로 걷어내는 동안 '신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개별적 존재들은 수없이 많은 질문과 대답을 만난다. 그 고독한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의 시작은 '나를 마주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나의' 산티아고>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개별적인 '순간'들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는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산티아고>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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