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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바나나 사건, '블랙독' 서현진은 용기있게 학생들 앞에 고개 숙였다

너의길을가라 2020. 1. 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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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게 애들한테는 대학이 왔다갔다 하는 거네요?"

tvN <블랙독>의 고하늘(서현진)은 최상위권 학생들로 구성된 동아리 '이카루스'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문제를 수정하는 것으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다. 중간고사는 문제없이 진행됐고, 채점도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정작 제일 큰 문제는 늘 뱀처럼 주변을 도시리고 있다가' 당사자가 '안심하고 있을 때 그 틈새를 파고'드는 법이다. 성적 마감을 고작 4일 앞두고 이의제기가 들어왔다.

'성순이가 바나나와 수박 두 개를 샀다.' 어휘적 중의성을 묻는 문제였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이 가능했다.

1. 성순이가 바나나 1개와 수박 1개를 샀다.
2. 성순이가 바나나 1개와 수박 2개를 샀다.
3. 성순이가 바나나 2개와 수박 2개를 샀다.

아마 문제를 낸 출제자의 의도는 이 세 가지 가능성을 찾아내라는 것이었으라. 그런데 어휘적 중의성에 대해 보다 충실하게 공부했던 최상위권 학생들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들어갔다. '바나나'를 단순히 과일명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고유명사로'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 되면 위의 문장은 성순이가 바나나(라는 이름의 사람)와 함께 수박을 2개 샀다는 해석도 가능했다.


분명 출제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답안이었지만, '어휘적 중의성'이라는 범위 안에서 본다면 틀린 답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국어과의 선배 교사들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의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사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시험 문제의 오류를 인정하게 되면 닥칠 후폭풍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신뢰가 무너져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시말서까지 써야 한다'

이미 물리 시험 문제의 오류로 인해 난리법석을 겪었던 터라 선생님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고하늘은 "이럴땐 수업을 기준으로 해야하지 않나요? 저희가 수업시간에 이 부분이 교제에 어떻게 나왔는지를 기준으로 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고하늘의 의견에 박성순(라미안)이 동의하며 회의는 마무리됐다.

이의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교사들의 결론에 대해 진유라(이은샘)는 "우리 고3인데 수업시간에 안 배웠어도 수능기출에 나오는거면 맞는 거" 아니냐고 반박했다. 고하늘은 어쨌든 시험은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찍어 눌러야 했다. 뭔가 개운치 않았다. 박성순은 찝찝하지 않나며 "경험상 애들이 이렇게까지 나올땐 애들 말이 맞는" 거라며 고하늘의 고민에 무게를 더했다


한편, 국어과 교사 하수현(허태희)이 이카루스 수업 시간에 어휘적 중의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피자와 치킨도 사람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내용의 수업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학생들의 반발도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어과 교사 지해원(유민규)은 고하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도연우(하준)과 함께 교육방송 교재 집필자에게 시험 문제 감수를 부탁하며 근거를 마련해 나갔다.

'성순이가 바나나와 수박 두 개를 샀다.'의 어휘적 중의성을 묻는 문제는 정교하지 못했다. '중의성'을 묻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문제 속의 '바나나'는 과일명이라는 단서를 달아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원천 봉쇄했어야 했다. 고하늘의 독백처럼 '실수'였다. 문제를 낼 때, 문제를 검수할 때 발견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은 교사의 몫이었다.

고하늘도 망설였다. 학생들의 신뢰를 잃는 게 두려웠다.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을 의심하는 사태가 벌어질까봐 겁이 났다. 게다가 그는 '기간제 교사'가 아닌가. 지위가 불안정한 기간제 교사는 발언권에 있어서도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재계약을 비롯해 정교사로 임용되는 데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6년째 기간제 교사인 지해원도 마지막까지 주저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미래가 걸려있는 일이었다. 문제 하나에 등급이 왔다갔다 했다. 원하는 대학에 가느냐 못가느냐의 중차대한 문제였다. 출신 대학으로 평가받고,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는 세상에서 '한 문제'는 인생을 좌우했다. 시말서를 쓰는 게 싫어서,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문제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사로서 직무유기가 아닐까.

학생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작성한 포스트잇에는 "고하늘쌤 이목구비는 우리의 미래보다 선명하다."고 쓰여져 있었다. 고하늘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젊은 교사들은 문제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고 밀어붙였고, 국어과 출신인 교장 변성주(김홍파)도 힘을 실어줬다. 추후에 외부에서 문제제기가 될 경우 뒷감당을 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될 국어과 바나나 사건은 복수 정답을 인정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하수현을 비롯한 일부 선생님들은 복수 정답 처리를 여전히 반대한다며 학생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길 꺼려했다. 학생들에게 욕을 먹는 게 겁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발뺌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지만, 그렇게라도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된 지금에야 깨닫는다. 선생님도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네가 맞고 내가 틀리다는 한마디, 별 거 아닌 그 한마디가 지금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고하늘은 그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학생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전에 설명했던 부분은 선생님이 틀렸습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고하늘은 쉽사리 얼굴을 들지 못했다. 교사로서의 권위가 산산조각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교사로서의 신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런데 학생들은 오히려 쿨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쌤, 그럴 수도 있죠.", "쌤, 괜찮아요."

교사의 진솔한 사과에 학생들은 비난하기보다 괜찮다며 위로했다. 교사와 학생들 간의 신뢰가 깨지고, 교권이 바닥을 쳤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안다, 교육 현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그러나 어쩌면 그 현실은 어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교사인 나는 옳고, 학생은 너는 틀렸다'는 입장만을 고집한 탓은 아니었을까. 진정한 교사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고하늘의 용기있는 선택들이 참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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