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촬영은 9시까지" 이영애의 요구를 다른 배우와 스태프도 할 수 있다면

너의길을가라 2015. 10. 4. 23:40
반응형



"작품을 계약할 때 표준계약서 이야기를 했었다. '관능의 법칙'은 표준계약서 이행에 있어 가장 앞서나간 영화다. 이 작품이 잘 돼야 표준계약서 이행이 더 앞당겨질 것 같다. 많이들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영화 <관능의 법칙> 권칠인 감독)


"개런티가 많은 배우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이 갔고, 스태프 중심으로 보너스가 지급됐다" (영화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


4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영화 <관능의 법칙>은 '표준계약서'가 처음으로 적용된 영화다. 영화제작자협회와 영화산업노동조합 등이 함께 만든 '영화산업 표준근로계약서'에 따라서 스태프들은 월급제, 4대 보험, 추가근로수장, 4시간 작업 후 30분 휴식(이것도 좀 심한 것 같지만, 워낙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니 이해하도록 하자) 등을 보장받았다. 그 흔하디 흔한 밤샘 촬영도 없었다. 


천만 영화(정확히는 1,426만 명) <국제시장>도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스태프의 처우(處遇)를 개선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영화인데, 7억 원의 보너스를 급여가 낮은 말단 스태프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이 지급하는 '역(逆)피라미드'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다. 바람직한 케이스가 분명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이 '선행미담'처럼 알려지는 까닭은 그만큼 촬영 현장의 스태프들이 열악한 환경과 처우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 TV리포트


이것이 영화 촬영 현장만의 일이겠는가? 드라마 현장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사전제작'이 적은 드라마 촬영은 후반부로 갈수록 '생방송'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밤생촬영은 기본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처우에 있어서도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맺는 경우가 다반사다. 게다가 정규직이 아닌 불안한 신분,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스태프들이 처해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어떨까? 물론 그들도 때론 밤을 새고 촬영에 임한다. 하지만 그 '밤샘 촬영'을 스태프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회당 몇천 만 원의 개런티를 받는 배우들이라면,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밤생 촬영' 쯤은 견뎌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쯤되면 배우들의 몸값을 줄여서 스태프를 비롯해 촬영 환경에 대한 투자를 늘여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다. 당연히 동의한다.





스태프가 철저히 '을'의 입장에 처하는 데 반해, 배우들은 충분히 '갑'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들을 관철시킬 힘이 있다. 모든 배우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이영애' 정도라면 충분한 일이다. SBS 드라마 <사임당, 더 허스토리(The Herstory) 촬영을 하고 있는 이영애는 오후 9시 이전에 모든 촬영을 마무리하고 가정으로 복귀하고 있다고 한다. 다섯 살 쌍둥이 자녀의 엄마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늦은 촬영을 지양하는 것이다.


드라마 관계자는 "이영애가 드라마에 합류하기 전 불가피한 촬영 외에는 늦은 밤 일정을 되도록 피해달라고 당부했다"면서 "가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쉽지 않은데 이영애는 흠 잡을 데 없이 양쪽을 균형있게 챙겨 괜히 프로가 아니구나 싶었다"며 찬사를 아까지 않았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는 이영애를 타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그럼 늦은 밤 일정은 누가 하지?



이영애의 촬영분이 오후 9시 이전으로 배치된다면, 다른 배우들의 촬영분은 그 이후로 몰릴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겐 '엄마(혹은 아빠)'로서의 역할이 없을까? 엄마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까? 어쩌면 이영애 한 사람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을지 모르는 일 아닐까? 드라마 관계자는 애써 이영애에 대해 미사여구를 동원해 칭찬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이영애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그는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을 뿐이다. 계약을 하기 전, 자신이 원하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관철시키고자 애쓰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다만, 그 정상적인 일이 현실 속에서는 소수의 몇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이 함정이랄까. 바람이 있다면, 이영애의 요구를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도 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이다. 


좀더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사전 제작을 하게 된다면, 무리한 밤샘 촬영은 없어질 것이다. 또, 회사의 근무시간처럼 정해진 시간을 두고 촬영을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야간 촬영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엄마의 본분'을 지킬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좋은 환경과 조건은 더 많은 인재들을 유입시키는 요인이 되고, 그런 선순환 구조는 더욱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촬영은 9시까지"로 못 받은 이영애의 요구는 자칫 한 사람의 이기심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뉴스가 허무하게 소비되길 않길 바란다. 촬영 환경의 개선, 배우들과 스태프의 처우 개선이라는 좀더 넓은 관점으로 이해된다면 훨씬 생산적인 결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