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쯔위 사태, 국기를 흔든 소녀와 소녀를 희생시킨 어른들

너의길을가라 2016. 1. 1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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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라는 말에 들어 있는 어감과 뉘앙스가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가 국기(國旗)를 흔들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사악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소녀'를 이용했다. 각자는 얻을 것을 취했는가. '소녀'는 수척(瘦瘠)해진 얼굴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누가 소녀에게 사과를 강요했는가. 무엇이 소녀의 고개를 90도로 꺾이게 만들었는가. 이 비릿함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한국인 5명, 일본인 3명, 대만인 1명으로 구성된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멤버 '쯔위(周子瑜, 17세)'는 지난해 11월 MBC 예능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에 출연해 태극기와 대만국기(청천백일기)를 함께 흔들었다. 물론 이 장면은 편집돼 본 방송에 나가진 않았지만, '인터넷 생중계'라는 <마리텔>의 방송 포맷상 편집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대만 국기를 흔드는 쯔위'는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도화선(導火線)이 된 건 소위 친중파로 구분되는 대만 가수 황안(黃安)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웨이보(微博)에 "쯔위가 대만 독립 세력을 부추긴다"며 <마리텔>의 방송 장면을 공개하면서 중국이 들끓기 시작했다. 웨이보엔 쯔위가 소속된 트와이스의 소속사인 JYP를 겨냥해 'JYP 보이콧'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했다. 


한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시장'이 적대적으로 변하자 이에 화들짝 놀란 JYP는 13일과 14일 사과 성명을 냈다. 하지만 논란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쯔위는 단두대(斷頭臺)에 서야했다. JYP는 쯔위에게 사과문을 낭동하게 만들었고, 그 영상은 지난 15일 밤 유투브를 통해 공개됐다. 500만 명 이상이 시청하고 13만 건이 넘는 댓글이 달릴 만큼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쯔위입니다. 

죄송합니다! 진작에 직접 사과드렸어야 했는데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직면해야 할지 몰라서 이제서야 사과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하나 밖에 없으며, 해협양안(항상 대륙과 대만을 표시하는 어휘)이 하나며, 전 제가 중국인임을 언제나 자랑스럽고 여깁니다. 중국인으로 해외 활동하면서 발언과 행동의 실수로 인해 회사, 양안 네티즌에 대해 상처를 드릴 수 있는 점에 매우 죄송스럽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께 사과드리는 마음으로 중국활동을 중단하고 제 잘못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사과 드립니다.


소녀는 '죄인(罪人)'이 됐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소녀는 '중국은 하나 밖에 없'다며 고국을 부정해야만 했다. 또, 해맑게 대만 국기를 흔들었던 소녀는 '전 제가 중국인임을 언제나 자랑스럽고 여'긴다고 말해야 했다. 이 강제적인 사과를 지켜봐야 했던 대만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처참함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갑자기 죄인이 된 소녀는 이러저리 휘둘리기 시작했다. 총통 선거를 앞두고 있던 대만의 정치권은 '쯔위'를 십분 활용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진당은 쯔위의 사과를 대만의 탄압으로 해석했고, '대만 독립 논쟁'으로 여론을 자극했다. 민진당의 '대만 주체성'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국민당은 정권을 내줘야만 했다.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은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총통에 당선됐다.


"한국에서 성장하는 한 대만 연예인이, 16세밖에 안 된 여성이 중화민국(대만) 국기를 든 화면 때문에 억압받았다. 이 사건은 당파를 불문하고 대만인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누구도 국민이 자신의 국기를 흔드는 것을 억압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나에게 국가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중화민국 총통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는 것을 영원히 일깨워줄 것이다." (차이잉원 당선인)



물론 차이잉원의 승리는 애초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쯔위 사태'이 일정한 영향을 줬다는 것은 분명하다. 쑤신황(蘇新惶) 대만 중앙연구원 인문사회과학연구센터 연구원에 따르면, '쯔위 사태'로 득표율이 1~2% 올라갔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만큼 대만인들에게 이번 사건이 준 충격파는 엄청나게 컸다. 


이처럼 한 소녀가 자국의 국기를 잠깐 흔든 '작은 날개짓'이 몰고 온 파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 파장을 자극하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뒤흔들어놨던 것은 분명 '어른'들이었다. 물론 이 사안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비롯되는 중국과 대만의 역사적 관계, '중화권'이라는 단일성을 포기할 수 없는 중국의 속내를 모르는 건 아니다. 주체성을 지키고 싶은 대만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마뜩지 않지만, 중국과 대만이 '쯔위'를 통해 각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겠다고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건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건 걔네들 문제니까'. '비릿함'의 발원지는 'JYP'다. 정녕 저 어린 소녀에게 사과문을 낭독하게 했어야만 했을까? JYP 입장에선 중국 시장을 붙들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겠지만 그 선택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JYP는 왜 그토록 잔인한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쯔위 사태'의 여파로 예정되어 있던 트와이스의 중국 방송 스케줄이 취소됐고, 2PM 닉쿤의 일정과 한국관광의 해 개막 행사에 출연하기로 했던 2PM의 일정도 취소됐다. 여파가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님은 자명했다. 이처럼 JYP 소속 가수들에게까지 후폭풍이 미치자 박진영은 JYP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 '반성문'을 함께 읽어보자.


안녕하세요. 박진영입니다. 


우선 상처 받으신 중국 팬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사건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일인지 본사 스텝들도, 어린 쯔위도, 심지어 저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후회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른 나라와 함께 일하는데 있어 그 나라의 주권, 문화, 역사 및 국민들의 감정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희 회사와 회사 아티스트들에게는 큰 교훈이 되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그동안 저와 저희 회사, 그리고 본사 소속 연예인들을 응원해주시고 아껴주신 중국팬분들께 실망을 끼쳐드린 점은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받으신 상처들을 만회하고, 여러분들의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여 한중의 우호관계 및 양국간의 문화교류에 기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쯔위는 지난 며칠 동안 많은 걸 느끼고 깨닫고 반성하였습니다. 그녀는 13살이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한국에 왔는데, 쯔위의 부모님을 대신하여 잘 가르치지 못한 저와 저희 회사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쯔위의 모든 중국 활동을 중단하고 또한 이번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미친 모든 파트너들과 관련된 사항들을 합당하게 처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극도의 저자세. 쯔위를 죄인으로 만들었던 JYP는 스스로도 무릎을 꿇었다. JYP가 상처 받은 대만 팬들에겐 어떤 태도를 취할지 궁금하다. 물론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한 '기업'의 선택을 비난하긴 쉽지 않다. 한류에 있어 중국 시장의 비중의 절대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또, '기업'의 처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대표'의 처지도 곤궁하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쯔위의 부모님을 대신하여 잘 가르치지 못한 저와 저희 회사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한다는 부분은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데, 그 뒷맛이 쓰고 아프다. 도대체 무엇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일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팩트'는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들었다'는 것이지, 중국 네티즌의 억측처럼 '쯔위가 대만 독립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를 넘어서는 해석에 대해서까지 '사과'를 강요하는 것은 온당한 것인가? 도대체 누가 무슨 자격으로 누굴 가르치겠다는 것일까? 설령 쯔위가 그런 소신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버리고 '이익'에 귀속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저토록 비참한 사과를 하도록 만드는, 인격 살인적인 행위를 '가르침'이라고 읽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MBC와 <마리텔> 측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괜히 나섰다가 뒤집어 쓸 것이 두려워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듯 하다. JYP는 극단적인 충격요법으로 '쯔위'를 내세웠다. '어른'들은 비겁했고, '소녀'는 희생됐다. 당장 중국 시장의 불편한 심기를 잠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덮일 문제는 아니다.


JYP는 시발점일 가능성이 높다. K팝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만큼 아이돌의 국적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제2의 '쯔위 사태'이 터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때마다 극도의 저자세를 취하며 '소녀(소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를 내세워 사과토록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소속사의 책임감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위기 대응 시스템이 필요하다. 매뉴얼이 필요하다.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은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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