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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딸 만난 엄마의 눈물, '너를 만났다' VR(가상현실)이 사람에 닿았다

너의길을가라 2020. 2.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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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온기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감성보다는 이성과 연결돼 있었고, 사람의 마음과는 동떨어져 있어 보였다. 건조하고 딱딱했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감각을 이용해 가상공간을 현실처럼 인식시키는 VR 기술은 상당한 발전을 이뤄냈지만, 한편으론 '돈벌이'를 위한 수단과 동의어 같았다. 게임, 테마파크, 교육사업.. VR의 미래는 뻔해 보였다.

그런데 'VR이라는 기술이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가 닿을 수 있을까' 이런 의외의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있었다. 기억 속의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VR을 통해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늘나라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상상 속에서나 꿈꿔 봤던 일들이 눈앞에 벌어진다면 어떨까. MBC특집 VR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는 그 따뜻한 순간을 담아냈다.


"잊어버리는 그런 느낌이 두려우신 (건가요)?"
"네, 약간 겁나요. 내가 사는 거에 지치거나 아니면 지금은 소정이랑 민서랑 나연이가 비슷한 나이니까 아직까지 기억을 하지만 나중에 소정이가 서른 살?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으려나.. 아무튼 그 나이가 돼도 나연이는 계속 일곱 살이잖아요."

네 아이의 엄마인 장지성 씨는 4년 전 세째 딸 나연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이라는 희귀 난치병에 속수무책으로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나연이는 일곱 살인 채로 머물러 있다. 장지성 씨는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질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내 딸 나연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지워질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은 가족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첫째 재우는 나연이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려했다. 동생을 떠올리면 너무 슬퍼지기 때문이었다. "너는 나연이 생각 안 나?"라는 엄마의 질문에 재우는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매일 생각한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촬영을 반대했던 재우는 시간이 좀 지나서야 나연이가 유독 자신과 친했다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많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소정)

둘째 민서는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어서 애써 담담히 행동했다. 동생 나연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흘러내렸지만, 집에서는 꾹 참는 듯했다.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에야 속마음을 얘기했다. 소정은 동생에게 뭐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며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막내 소정이는 자신을 가장 예뻐했던 언니로 나연을 기억했다. 자신과 놀아주고 잘 때 뽀뽀를 해줬던 언니로 말이다.

아빠 강현구 씨는 꿈속에서 딸을 만나 꼭 끌어안고 있었던 순간을 회상하며 "마음이야 12시간이라도 자죠. 12시간 동안 만난다고 그러면. 수면제 먹고라도 자야죠."라고 말했다. 이렇듯 가족 모두 나연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가슴에 사무치는 그 그리움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기억하는 방식과 슬픔을 다스리는 방법은 각자 달랐지만, 먼저 떠나간 나연을 향한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사발을 이렇게 얼굴에 대고 마셔요. 그리고 나서 엄마한테 이렇게 따봉을 날려주는, 그거 받으려고 제가 열심히 미역 볶아서 해줬거든요."

장지성 씨의 바람은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딸을 다시 만나 그 아이가 좋아했던 미역국을 끓여주고 너무도 사랑한다고,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과연 그의 간절한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물론 현실세계에선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확하다. 허나 VR의 힘을 빌리면, 그 가상세계 속에서만큼은 꿈꿔 볼 수 있는 일 아닐까?

<너를 만났다> 제작진은 모녀의 재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국내 최고의 VR, VFX(특수영상)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비브스튜디오와 협업했다. VR 속 나연을 실제와 가깝게 만들기 위해 가족과의 인터뷰, 휴대전화 속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과 동영상을 참고 해 나연이의 표정, 목소리, 말투, 몸짓을 분석했다. 사람들이 흔히 누군가를 기억한다고 할 때 떠올리는 것들이었다.

분석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비슷한 나이대의 대역 모델을 촬영해 나연이의 기본 뻐대를 만들었다. 동작을 포착하는 모션 갭션 기술을 활용해 생동감을 불어넣었가.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동영상에서 추출했지만, 분량이 짧았기에 나연이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또래 아이 5명의 목소리로 800 문장 이상을 녹음한 후 딥러닝(인공신경망 기반 기계학습) 과정을 거쳤다. 장장 8개월의 대작업이었다.


"어디 있어? 만지고 싶어."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나연이를 만나는 날. 가족들은 저마다의 마음가짐으로 나연이와의 만남을 준비했다. 아빠 강현구 씨 조금 냉정해지기로 했고, 아이들은 조금 들뜬 것만 같았다. 엄마 장지성 씨는 긴장이 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회의 순간 딸에게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을까. 마음의 준비를 끝낸 장지성 씨는 장비를 착용하고 VR 속으로 들어가 나연이를 애타게 불렀다. 잠시 뒤 나연이 엄마를 향해 뛰어왔다.

"엄마, 어디 있었어?"
"엄마? 항상.."
"엄마, 내 생각했어?"
"맨날 해."
"나는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
"엄마도 너 보고 싶었어."

엄마는 눈앞에 나타난 딸을 만지려 애썼다. VR 속 나연을 어루만지기 위해 애처롭게 떨리는 손동작은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을 향한 그리움과 미안한, 그리고 간절한 사랑이 느껴졌다. 물론 VR 속 나연이 실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장지성 씨에게 그건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처 떠나보내지 못했던 딸과의 이별의 시간, 그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두 사람은 함께 나연이의 7번 째 생일을 축하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나연이는 미역국을 사발로 들이켰다. 그리고 "우리 아빠 담배 안 피우게 해주세요. 오빠랑 언니 싸우지 말고 소정이 아프지 말고 그리고 우리 엄마 울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다. 조금은 장난스럽게 지켜보던 형제들은 금세 진지해져 눈물을 쏟았고, 아빠는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를 향해 더 이상 울지 말라는 나연을 향해 장지성 씨는 "안 울게. 엄마가 안 울고 너 그리워하지 않고 너 많이 사랑할게."라고 약속했다. 엄마는 딸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짧지만 소중한 시간, 꿈만 같은 순간이 지나갔다. 비록 VR 속 나연과의 재회였지만, 장지성 씨의 표정은 한결 평온해 보였다. 나연이에 대한 마지막 기억을 좀더 행복하게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VR이라는 기술이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가 닿을 수 있을까. <너를 만났다>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건넸다. 그것이 첨단 과학의 산물이며, 실제 나연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걸 알면서도 장지성 씨는 그 순간 딸과의 만남에 완전히 몰입했다. 적어도 장지성 씨와 그 가족들에게는 나연이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기술이 마음에 가 닿았은 것이다.

최근 들어 VR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시각과 청각을 재현하는 기술(80%)은 상당한 진전을 이뤘지만, 촉각이나 후각 등에 있어선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여전히 VR은 인간에게 그것이 헌실이 아니라 인위적인 환경이라는 걸 인식시킨다. 그러나 <너를 만났다>는 단순히 기술을 발전시키는 게 전부가 아님을 상기시켰다.

희귀 난치병으로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나연이를 재현하고, 가족들과 못다한 이별 의식을 갖는 기회를 마련해 준 <너를 만났다>를 통해 VR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과학(기술)과 온기가 한 바구니에 담기자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쓰여졌다. 과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기술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결국 사람(의 마음)에 가 닿아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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