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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보는 눈

아노미 상태에 빠진 야권, 갈림길과 막다른 길에서도 긍정하라




아노미(anomie)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야권의 처지와 야권 성향 지지자들의 심리 상태를 간단히 표현하면 얼추 그 정도일 것이다. 4.24 재보궐 선거의 결과는 간단했지만 명쾌하지는 않다. '안철수'라고 하는 제3세력이 국회로 들어왔다. 그는 이제 '바깥'이라고 하는 유리한 포지션이 아니라 이젠 '내부'에서 싸워야 한다. 새로움과 신선함을 무기로 삼고 있는 '안철수'로서는 앞으로의 몇 개월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래도 다르긴 다르네'의 찬사를 받든지, '역시 똑같네'라는 실망을 받든지 어차피 길은 두 가지뿐이다. 


민주당은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선거 국면 그 어디에도 '민주당'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에겐 5.4 정당대회에서 허울뿐인 당권을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일까? 시민의 외면을 받는 정당의 당 대표 자리가 그토록 갖고 싶은 것일까?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도 낙제점을 받아들었다. 특히 노원병에서 김지선 후보가 한 자릿수 득표를 기록한 것은 뼈아프다. 반면, 새누리당은 쌩긋 웃었다. 허준영 후보가 낙선하긴 했지만 그다지 기대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버리는 카드였던 셈이다. 핵심 지역이었던 부산 영도에서 김무성 의원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다. 야권의 표는 고작 34%(민주통합당 김비오 후보 - 22.31%, 통합진보당 민병렬 후보 - 11.95%)밖에 되지 않았다. 충남 부여에서는 이완구 후보가 77.4%를 득표했다. 야권의 표는 고작 22%(민주통합당 황인석 후보 - 16.86%, 통합진보당 천성인 후보 - 5.72%)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과는 한마디로 정리가 가능하다. 구(舊)야권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불신과 불만이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에 보내는 분명한 경고인 셈이다. 시민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지난 글에서도 거듭 언급했지만, 대선 이후 민주당이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실망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도 마찬가지다. 쇄신하지 않으면 정말 '구(舊)' 세력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




- <news1>에서 발췌 -



기존의 야권을 지지하고 있는 시민들로서는 일종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에 기대를 품는 건, 현재로선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민주당을 밀어주자니, 이들은 언제나 '삽질' 중이지 않은가? 게다가 문재인은 대선 패배의 책임이라는 굴레에 발이 꽁꽁 묶여 있다. 전당대회의 결과는 이른바 친노 세력에게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숨 죽이고 기다리는 것 말고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내부적 결속도 되지 않는 정당이 '아젠다'를 설정하고 이끌어 나간다는 건 꿈과 같은 일이다. '국정원 사건'에 있어서도 몇몇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 외에 당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들에겐 5.4 전당대회를 통한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안철수를 무작정 신뢰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인에게 그런 힘은 없다. 만약 그가 신당을 창당하고, 다음 총선에서 과반의 의석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런 일은 이뤄지지 않는다. 안철수에게는 안철수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그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의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인 셈이다. 그럼에도 의구심은 남는다. 안철수가 말하는 '새정치'의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힘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정치판에서 표류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놓다보니 꽤나 암담한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식상한 말이지만,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암울한 순간이라도 '희망'은 존재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숨을 고르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오히려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내 생각들도 점검해봐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말, 내가 하고 있는 행동들이 깊은 고민과 성찰 속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단지 감정적 배설에 지나지 않은지 되새겨봐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물길에 쓸려 혹은 바람에 휩쓸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서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루쉰의 말을 꼽씹어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인생이라는 장도에는 큰 난관이 두 가지 있다.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가 그것이다. 갈림길에서는 묵적 선생도 통곡하다 돌아갔다고 하지만, 나는 울지도 돌아가지도 않고 우선 갈림길 앞에 앉아 쉬거나 한숨 자도 괜찮을 만한 길 하나를 택해 계속 걸어갈 것이다. 가다 정직한 사람을 만나는 음식을 달라 해서 허기를 달래되, 길을 묻지는 않으련다. 내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그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호랑이라도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놈이 배고픔을 참다 못해 제 갈 길을 가면 그때 내려올 것이고, 끝내 가지 않는다면 나무 위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허리띠로 몸을 꽁꽁 묶어두고 시체마저도 놈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없다면 놈에게 잡아먹히긴 먹히되, 놈을 한 입 물어뜯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완전 선생도 대성통곡을 하고 돌아갔다는 막다른 길에서는 갈림길에서처럼 성큼 걸어갈 것이고, 가시밭길이 가로막는다 해도 여전히 걸어갈 것이다. 다만 온통 가시밭길뿐이어서 결코 갈 수 없는 길은 분명 한 번도 맞닥뜨려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본래 막다른 궁지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거나.



- 루쉰 -



'희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있다고 믿는다. 루쉰의 처지가 지금의 우리의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조차도 '본래 막다른 궁지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행히도 아직 그 지경에 이르지 않았거나.'라며 상황을 긍정한다. 지금 당신과 내가 갈림길 앞에서, 막다른 궁지라고 생각되는 길 위에서 좌절하고 통곡하고 있다면 고개를 들자. 우리가 선택한 그 길을 성큼 성큼 걸어가자. '그 지경'은 아직 오지도 않았고,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 하나만큼은 꼭 기억하자. 야권은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