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 연예/'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톺아보기

변질 우려되는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지금보다 더 과감해져도 돼

너의길을가라 2019. 3. 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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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관찰 예능의 시대이다. 더 이상 '관찰(觀察)'이라는 방식은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다. 관찰은 상수(常數)가 됐다. 관건은 '무엇을(혹은 누구를)' 관찰하느냐이다. 일각에서 '어떻게' 관찰하느냐로 나아가는 시도가 엿보이지만, 아직까진 관찰의 대상을 설정하는 문제로 왁자지껄하다. 그러나 결국 개인의 사생활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찰 예능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생활이라는 게 끝내 지인, 가족으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관찰 예능은 (나름대로) 시대와 적극적으로 호응해 왔다. 대표적인 육아(育兒) 예능인 MBC <아빠! 어디가?>와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 (잊혔던) 아빠의 역할을 상기시켰다. 그 인식은 여전히 '도와준다'에 고착돼 있고, 그 잠깐의 도움을 줬다는 것만으로도 할 도리를 했다는 면죄부로 이어지는 경향을 낳았지만, '아빠의 역할'에 대해 많은 화두를 던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KBS2 <살림하는 남자들>은 제목 그대로 남자 스타(김승현, 김성수 등)들이 가정에서 살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오래된 성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여자 스타들이 살림하는 모습은 (당연한 일이므로) 방송의 소재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강고한 성 고정관념을 재확인하게 된다. 무려 남자가 살림을 해야 관찰의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


그런 의미에서 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매우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다. 우선, 가족 내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됐던 '며느리'라는 이름을 내세웠고, 그 '시선'을 취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관찰의 대상도, 관찰의 시선도 며느리였다. 시댁을 '이상한 나라'라고 명명하면서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가부장제 가족 문화를 겨냥했고, 그 안의 불합리한 구조적 문제들과 부조리한 관계들을 드러내자 수많은 며느리들이 화답했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이하 <이나리>)는 남성을 내세워 오히려 기존의 성 고정관념을 방어하는 데 일조했던 여타의 관찰 예능보다 진일보한 과감한 프로그램이 분명하다. 시대의 변화 양상에 맞게 새롭게 정립돼야 마땅한 남녀의 (특히 가정 내에서의) 성 역할에 대해 적절한 질문을 적절한 방식으로 건넨 유일한 프로그램이라 할 만하다. 물밑에서 아우성쳤던 여성들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공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변질'이다. 달리 말하면 '타협'이라고 할까. 최근 들어서 <이나리>의 '포지션'이 애매해졌다. 본래의 위치가 '고발'을 통해 '고민'을 나누고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특유의 예리함보다 '훈훈함'이 앞선다는 인상이다. 개별적으로 파고들면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못된 시어머니도 알고 보면 누군가의 헌신적인 엄마이다. 그러므로 이 프로그램이 겨냥해야 할 유일한 목표는 '며느리를 착취하는 구조적 모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구조 속의 개별적 존재들을 '포장'하는 데 별도의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고창환-시즈카 부부위 경우, 논란이 됐던 시누이의 속내는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이 계속 됐다. 오정태-백아영 부부의 경우, 동생들을 불러모은 시어머니가 온갖 센 척을 다하다가 나중에 며느리를 따로 불러 '내 체면을 세워줘서 고맙다'며 고맙다고 하는 장면이 부각됐다. <이나리>의 MC들은 시어머니의 반전 모습을 애써 감동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시즈카의 시누이는 여전히 막무가내이고, 시어머니는 '설거지는 네가 하라'고 타박한다.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비판의 여지는 좁아졌다. 그들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니까. 제작진의 고민도 일정 부분 이해가 된다. 달을 가리키면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바라보기 마련, 시청자들은 당장 드러나는 갈등에 주목하고 그 대상에 비난을 쏟아붙는다. 비연예인의 입장에서 그런 부정적 반응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악마의 편집 논란이 한 차례 있었던 만큼 제작진의 입장에서 조심스러운 건 당연하다. 큰 논란이 됐던 가족들이 소리소문 없이 방송에서 사라진 건, 단지 스케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제작진은 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힘을 빼버리면, 이도 저도 아닌 아무 의미 없는 관찰 예능에 지나지 않는다. 제작진은 분명한 목표 의식과 콘셉트를 지켜 나가야 한다. 



MC들도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추임새를 넣기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초반에는 제법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던 이현우와 권오중은 스튜디오에 나와 있는 남편들을 (그것도 장난스럽게) 타박하는 데 자신의 분량을 소진하고 있고, 명쾌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줬던 이지혜도 최근 들어서는 어중간한 역할에 머물고 있다. 특히 고미호를 대할 때의 태도는 '시누이'의 그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나리>가 좀더 과감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훨씬 더 자극적이고 되바라져도 무방하다.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출연 가족들의 개별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우리 행복해요'라고 마무리하는 게 '이나리'의 궁극적 목표일리 없다. 굳이 '막장'을 소환할 필요는 없지만, 본질적인 갈등 구조를 날렵하게 잡아채 불합리한 이야기들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전히 며느리들의 막막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단지 쉬쉬하거나 참고 사느라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지 않았을 뿐이므로, 며느리들이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은 <이나리>의 재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잔혹하므로. 무엇보다 <이나리>가 이 땅의 며느리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실상 유일한 공적 채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나리>가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뒤집어 엎어도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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