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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술사에서 유일무이, 60년을 밀어낸 하종현의 '마대'

너의길을가라 2022. 2. 2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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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국제갤러리'를 다녀왔습니다. '단색화의 선구자'라 불리는 하종현 화백의 세 번째 개인 전시회가 열리고 있거든요. (전시는 3월 13일까지 진행되고,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하종현 화백
- 1935년 경남 산청 출생
- 1959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 졸업
- 1990년-1994년 홍익대 미대학장
- 2001년-2006년 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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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살 돈이 없어 원조식량을 담던 마대에라도 그려보자고 시작했다. 그게 1960년대니 평생을 마대와 싸운 셈이다." (하종현)



작품이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이죠?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소재'와 '기법' 때문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캔버스에 '그려'지죠. 하지만 하종현은  캔버스가 아니라 마대의 소재인 마포(麻布)를 활용합니다. 흔히 '마대 자루'라고 부르는, 폐기물을 담아 버리는 그것 말이죠.

하종현이 작품의 소재로 마포를 선택한 건 '가난' 떄문이었습니다. 그가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전도유망한 예비화가'로 불렸던 시절은 한국전쟁 직후였는데요. 당시는 보릿고개로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죠. 궁핍하긴 하종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꿈과 같은 일이었죠.

하종현, '접합 21-51', 2011

"올이 굵고 억센 마대 위에 그리는 건 어려웠다. 결국 물감을 뒤에서 밀어냈고, 그 작업을 일생에 걸쳐 연구하고 실행했던 셈이다." (하종현)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주한미군이 버리고 간 마대였습니다. '뭐든 되겠지!'라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대는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올이 굵고 성긴 삼실로 짠 마대 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젊은 화가 하종현의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우선, 마대를 캔버스마냥 빳빳하게 당겨봤겠죠? 앞면이 안 된다면 뒷면은 어떨까요. 뒤집어서 물감을 칠해봤습니다. 앞면보다야 나았겠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성긴 틈새로 물감이 삐져 올라갔을 테니까요. '아, 이것도 안 되네.'라고 실망했을 그의 표정이 상상됩니다.

그때, 한줄기 빛이 번뜩였습니다. 마대 뒷면에서 삐져나온 물감이 앞면에 특별한 무늬를 만들어낸 것을 발견한 거죠. 유레카! 이번에는 아예 천 뒤에 물감을 두껍게 발라 앞면으로 밀어내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명 '배압법(背押法)'이라는 기법입니다.

하종현, '이후 접합 11-3', 2011

"이게 다 그런 거예요. 마대에서부터 뒤에서 낸 이 물감들이, 마대의 형태에 따라서 이상항 형태, 꼬부라지는 형태도 나오고, 좀 굵은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고, 뭐 여러 가지 형태가 나오는데 사람의 얼굴도 똑같은 얼굴이 없잖아요. 자기가 자기의 얼굴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하종현)



그렇게 세계 미술사에 있어 유일무이한 예술세계가 탄생하게 됩니다. 물감 한 색을 마대 뒤에서 밀어낸 연작 시리즈 '접합(Conjunction)'은 하종현을 단색화 거장으로 등극시켰죠. 이제 하종현의 작품은 없어서 못 사고 못 팔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경매시장에서 하종현의 작품은 낙찰률 94.29%(35점 중 33점 낙찰)를 기록할 만큼 뜨거운 인기를 누렸습니다. 낙찰 총액은 27억 2672만 원에 이릅니다. 이는 낙찰총액 20위에 해당하죠. 오랜 세월 고민하고 연구했던 그의 예술세계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셈이죠.

최근에는 다채색을 활용한 작품들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자 하고, 나무 합판조각을 사용해 조각적 요소를 더해 여전히 발전하고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고집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만들어낸 하종현의 개인전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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