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사재혁이 아니라 사재혁을 만든 배경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너의길을가라 2016. 1. 5. 00:01
반응형


언젠가부터 '올림픽(Olympic)'과 같은 엘리트 스포츠(Elite Sport)를 잘 챙겨보지 않는다. 선수들이 보여주는 투혼은 가슴뭉클한 감동을 선사(膳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 감동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의 첫 번째 이유는 스포츠에 투영된 국가주의 때문일 것이다. '세계 평화'라는 고상한 외침과는 달리 올림픽의 기원이 결국 '전쟁'인 것은 그 폭력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 올림픽은 '가상의 전쟁터'다. 그리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국력(國力)을 경쟁하는 가상의 전쟁터로 내몰리는 병사들과 같다. 선택받은 소수의 선수들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Sparta)의 전사들처럼 '길러'진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양병(養兵)된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한다. 희생을 강요당한다. 물론 그것은 '자발적'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된다. 


불편함의 두 번째 이유는 '편견(偏見)' 때문이기도 하다. 심심찮게 보도되곤 하는 '체육계'의 부조리한 모습들은 운동 선수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전제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왜곡된 선후배 문화와 뿌리 박힌 폭력 문화, 이 두 가지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그것을 체육계만의 문제라고 할 순 없겠지만, (마치 조폭처럼) '몸'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체육계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오뚝이' 사재혁(31) 선수의 후배 폭행 사건은 체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의 집약(集約)처럼 보인다. 2015년 12월 31일에 발생한 폭행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언론 보도에 따라 다소 엇갈리는 측면이 있지만, 분명한 확인되는 사실은 사재혁 선수가 후배인 황우만(21) 선수를 폭행해 전치 6주의 상해를 가했다는 점이다.


폭행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피해자인 황우만 선수의 진술을 들어보자. "지난해 초 태릉선수촌에서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사재혁 선배에게 얼굴을 한두 대 정도 맞은 적이 있는데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 게 화근이었다" 황 선수는 30분 가량을 일방적으로 맞았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번 사건이 단순한 폭력 사건과 궤(軌)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치고박고 싸움을 벌인다거나 지인들끼리 술자리에서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폭력이 발생한 것과는 분명 다르다. 사재혁 선수의 행위를 규정짓자면, 체육계 선후배 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이자 선배라는 이름으로 가한 일방적인 폭력 행위이다. 


사재혁 선수는 태도가 불량한 후배를 '징계'하는 것은 선배로서 할 수 있는 정당한 행위이고, 그 따끔한 가르침을 타인에게 발설했던 후배를 응징하는 것 또한 선배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사 선수만은 아닌 듯 하다. 지난 2014년 한국 유도의 간판이었던 왕기춘 선수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은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의 정당화 논리를 잘 보여준다.



'말로 타이르고 주위 주는 건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는 왕 선수의 발언에는 체육계의 현실이 담겨져 있다. 물론 그것이 체육계만을 비추는 거울은 아닐 것이다. 체벌을 옹호하는 목소리의 이면에는 언제나 '맞을 짓'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묻고 싶다. 도대체 '맞을 짓'이란 게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그 주관성을 떠나서 애초에 '맞을 짓'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맞을 짓'도 없고, '맞아야 할 사람'도 없다. 당연히 '때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선배는 후배를 때릴 수 있다는 생각, 잘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을 저지르면 때려도 된다는 생각이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체육계에 뿌리내려 당연시 된 것이다.



물론 모든 체육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인(였던) 박지성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나를 때린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배가 되면 결코 후배들을 때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쓰기도 했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노력하는 예외적인 소수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체육인들이 박지성 같길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한역도연맹은 사재혁 선수에게 선수 자격정지 10년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로써 사 선수는 사실상 선수생활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가해자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처벌이 '때찌때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만, 거기에서 멈춰선 안된다. 지금의 사재혁, 다시 말해서 '정당한 폭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재혁, '선배는 후배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재혁을 만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거기에는 선후배의 위계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체육계의 관행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또, 체벌을 통해 '경기력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체육계의 잘못된 인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체육계의 진지한 고민과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음습한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의 그늘이 짙게 깔려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벌'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인식을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사재혁은 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지금의 사재혁을 만든 구조적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재혁'이 아니라 사재혁을 만든 '배경'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