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칭찬합시다

[버락킴의 칭찬합시다] 4. 차인표 같은 삼촌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길을가라 2017. 1. 2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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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았다. 우연처럼 다가온 필연이랄까, 천간지지(天干地支)의 조합이 그야말로 상징적이다. 한바탕 시끌벅적했던 설 연휴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명절을 지내다 문득 이런 '삼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참 듬직할 것 같다. 그의 '선(善)'하고 밝은 기운이 온 집안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다. 누구냐고? 바로 배우 '차인표'다. 67년 생인 그는 어느덧 (놀라지 마시라!) 5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삼촌' 같은 이미지로 대중 곁에 남아 있다. 



차인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그가 남겼던 2016년 최고의 '명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12월 31일 '2016 KBS 연기대상'에서 라미란과 함께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한 차인표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50년을 살면서 느낀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둘째, 거짓은 결코 참을 이길 수 없다. 셋째, 남편은 결코 부인을 이길 수 없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삶의 지혜와 철학이 담긴 한마디였다. 실제로 조금씩이나마 '어둠'이 걷히고,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1993년 MBC <한 지붕 세 가족>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데뷔했던 차인표(MBC 공채 탤런트 22기)는 1994년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통해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터프가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가죽 재킷과 오토바이, 그리고 색소폰을 부는 섹시한 모습은 차인표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근육질 상반신을 과감히 노출(지금에야 당연하다시피 여겨지는 퍼포먼스지만, 당시엔 파격적이었다.)하면서 대중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차인표는 단 하나의 작품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함께 출연했던 신애라와 열애를 시작해 이듬해인 1995년 결혼에 '성공'한다. 거칠 것이 없는 탄탄대로였다. 물론 '결혼=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어딜 가나 "배우자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큰데, 그런 면에서 나는 장가를 진짜 잘 갔다"고 말하는 '애처가' 차인표의 생각을 전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그가 '이등병' 때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재미교포였던 차인표는 굳이 군대를 가지 않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한다. 훗날 차인표는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군대에 안가면 편법을 쓰거나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하긴 싫었다"고 밝혔다.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 것일까. 제대 후 복귀작이었던 MBC <별은 내 가슴에>는 최고 시청률 49.4%를 기록하며 한마디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차인표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한 차인표는 안주보다는 변화를 선택했다. MBC <왕초>(1999)에서 거지들의 왕 '김춘삼' 역을 맡아 파격적인 연기 변신에 나선 것이다. 자신을 따라다녔던 '재벌', '카리스마' 라는 제한된 카테고리를 벗어던지길 원했지만,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반듯한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는가. 이후 MBC <영웅시대>(2005), MBC <하얀거탑>(2007), SBS <대물>(2010) 등에서 자수성가한 기업가, 의사, 국회의원 등 선이 굵은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나도 웃기고 싶은 욕구가 있다"며 시트콤 출연을 결심했고, "19년 동안 안 망가지고 버틴 차인표가 망가지길 원하시는구나 싶었다. 대중이 원한다면 잘 망가지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후 KBS2 <선녀가 필요해>(2012)에서 잔뜩 망가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코미디 연기는 차인표에겐 큰 자산이 됐던 것 같다. 최근 출연 중인 KBS2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2016)에서는 라미란과 호흡을 맞추며 좀더 편안한 연기를 선보이며 보다 친숙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게 됐다. (비록 드라마는 산으로 가고 있지만..)



"배우는 내 직업일 뿐이다. 우리 자식세대가 우리 때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소명이다." (차인표)


이처럼 차인표가 20년이 훌쩍 넘는 기간동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배우로서의 신뢰감을 줄 수 있었던 바탕은 언행일치를 이룬 올곧았던 그의 삶 자체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차인표는 신애라와 함께 2005년부터 컴패션(기독교 기반의 국제 구호 기구, 전 세계 가난한 어린이를 후원자와 1:1 결연해 양육한다)을 통해 나눔을 실천했다. 또, 방글라데시, 에디오피아, 필리핀 등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어린이 후원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처음 우리 두 아이를 입양했다는 이야기를 남편 차인표씨가 주변에 밝혔을 때 여기저기서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은 '입양은 칭찬이 아니라 함께 축하받아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신애라)


차인표 신애라 부부는 두 딸을 공개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도 공헌했다. 또, '공개입양'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입양을 해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는 건 의무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조언을 건네며 용기를 북돋기도 했다. 2008년에는 탈북자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크로싱>에 출연했고, 2009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소설 『잘가요 언덕』으로 소설가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사회의 선(善)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2014년 기부협동조합 신협사회공헌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된 차인표는 2015년 '밥상 공동체 연탄은행'에 연탄 20만 장(약 1억 4천만 원)을 기부했고, 겨울마다 취약계층 가정에 연탄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에게 왜 이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대중들이 주신 인기 덕분에 분에 넘치게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나는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들이 제게 주신 돈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 뿐이다" (<이데일리>, 차인표 "선행? 대중이 주신 돈, 돌려 드리는 것 뿐")


무엇보다 차인표가 빛나는 까닭은 그가 대중들의 슬픔과 분노 속에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차인표는 신애라와 함께 임시 분향소를 찾아 희생자들을 조문했고, 지난해 탄핵 정국에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광화문 광장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기도 했다. 대중들이 슬픔에 잠겼을 때 그들을 위로하고, 대중들이 분노에 찼을 때 앞장 서 대신 화를 내주는 것이야말로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을 대변하는 '배우'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차인표는 그 누구보다 '배우'로서 뜨거운 삶을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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