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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

맞아도 되는 사람이 있을까? 맞을 짓이란 게 있을까? 본문

사회를 듣는 귀

맞아도 되는 사람이 있을까? 맞을 짓이란 게 있을까?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2013. 5. 21. 21:01



"구성원 하나하나의 신체와 재산을 공동의 힘을 다하여 지킬 수 있는 결합방식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결합 이후에도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것."


- 장 자크 루소 -




우선, '국가에 의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근대국가'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계약의 산물이다. 일종의 '발명품'인 셈이다. 국가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두고 싶다. 결코 국가가 개인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반대 의견이 존재할 것이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강조하시는 분들에겐 조금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사회적 계약에 따라서 국가에 의한 '정당한 폭력'은 허용되고 있다. 국가는 '법'에 의해, 범죄자들을 잡아 들이고 처벌한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공권력'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정당화된다. 물론 그 또한 철저히 법에 의해 제한된다. 헌법을 통해 제한하고 있고, 형사소송법에서는 이를 세세히 규정하고 있다. 물론 '법'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나 국가는 과도하게 시민들을 억압해왔고, 상당성에서 벗어난 '폭력'을 행사해왔다. 시민들은 국가가 '정당한 폭력'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합리적으로 사용하는지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 






- <세계일보>에서 발췌 -



맞아야 할 사람도 없고, 맞을 짓도 없다.


자,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과연 개인 간의 '사적 폭력'은 허용될 수 있을까?


'저 놈은 맞아야 돼'

'맞을 짓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쓰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성립가능한 말일까? 단언건데, 필자는 맞아야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맞을 짓도 없다. 맞아야 할 사람이 있고, 맞을 짓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맞을 짓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때릴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당신은 '때릴 사람'인가, 아니면 '맞을 사람'인가? 


'폭력'은 가장 간단하고 편한 훈육 방법이다. 말을 안 들으면 때리면 된다.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겁을 먹고 눈치를 살피게 될 것이다.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는 더 이상 '폭력을 휘두른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올바른 훈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필자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매주 챙겨보곤 했었는데,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관찰해보면 대부분 '잘못된 훈육'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엄마와의 관계'였지만..) 방송을 보면 '와.. 저런 아이가 과연 바뀔 수 있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말썽꾸러기들은 다시 아주 예쁘고 착한 아이들로 변했다. 전문가가 등장해서 아이들과 만나 훈육을 하는 과정에는 결코 '폭력'이 수반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은 길고 지루한 것일 수 있다.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1주일이 걸리고, 한 달이 걸리는 기간이 필요했다. 참고 인내해야 했다. '폭력'을 통해 한번에 제압하는 것이 간단하고 빠른 방법일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상처'를 남기는 일이다. 그 상처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고, 평생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을 자신의 아이에게도 반복하고 말 것이다. 폭력의 되물림이다. 


얼마 전, 농구선수 이현호의 훈계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그 부모를 욕했다. 필자도 이현호의 용기있는 행동을 칭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현호의 훈계의 방식이 잘못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훈계 도중 화가 나서 '폭력'을 사용했다. 이는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때려도 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이는 반대로 나에게 화가 난 누군가가 나를 때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라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의 체벌은 어떠한가?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시절,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싸고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특히 큰 반발을 불러온 것은 '체벌 금지'였다. 교사들은 교권의 추락을 말하고, 대다수의 어른들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체벌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연 '일정한 범위'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또 어른들이 딱 그 범위 내에서 체벌을 가할 수 있을 만큼 인격적으로 성숙한 존재인지.. 여러가지 논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넘어가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고가고 싶은 것은 '체벌'이 아니면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이상한 논리다. 우선, 아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만 단체 생활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여전히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소위 선진국의 사례는 어떠한가? 그 나라들에서도 '체벌'이 있어야만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하는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결국, '효과 빠른' 혹은 '효율적인(?)' 방법을 찾고자 하는 어른들이 쉽게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체벌'인 것 아닌가? 내 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말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서 '체벌(폭력)'을 통해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겁먹게 하는 것이 '체벌'의 기능 아닌가? 


교육과 관련해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은 자명하다. 애써 '체벌의 필요성'을 찾아낼 필요가 없다. 거기에 골몰할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학급 당 학생 수를 줄여서 선생님과 학생들 간의 거리를 좁히고 교감을 확장해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은 방법 아닐까? 그 시간을 인내해주는 것이 어른의 '의무와 책임'이 아닐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국가에 의한 폭력'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개인 간의 사적 폭력은 결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학교에서의 체벌도 마찬가지다.) 이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끝내 자신들의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르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폭력'으로 응징한다면.. 그러한 '사적 폭력'이 허용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똑같은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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