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대통령의 시정연설, 오로지 국정화를 위한 다급했던 쇼

너의길을가라 2015. 10. 28.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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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다. 현직 대통령이 3년 연속 시정연설을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 형식적으로는 국회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국회 내의 갈등만 더욱 키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인한 논란에 대통령이 작정하고 기름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2016년 예산안 시정연설'이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었던 탓에 약 40분 가량 이어진 연설은 경제(56회), 청년(32회), 개혁(31회)에 많이 할애됐다. 비록 '역사'라는 단어는 11차례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연설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면서 사실상 이번 시정연설의 핵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 이번 시정연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을 밀어붙이기 위한 대통령이 만든 화려한 '쇼'였다.




야당의 시위로 연설이 15분이나 지연됐음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박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언급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표정과 어조는 단호(라고 쓰고 사나워졌다고 읽자)해졌고, 손짓이 커지는 등 제스처도 격렬해졌다. 언제나 기계처럼 '읽는' 연설만 해오던 박 대통령에게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해졌다. 그의 '진심' 말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바라는 것이구나.


다음은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 전문 가운데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된 부분만 발췌한 것이다.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저는 취임 후 줄곧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적폐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제가 추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사회 곳곳의 관행화된 잘못과 폐습을 바로잡아 '기본이 바로 선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 도대체 어떤 비정상적 관행과 적패를 바로잡아 왔는지 되묻고 싶다. 그나마 정상적이던 것들마저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렸던 지난 3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따지고 싶다. 물론 이런 물음은 '메아리'에 그치겠지만.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육 정상화도 미래의 주역인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 우선, 국정화를 정상화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현재의 교과서들은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전략은 매우 영리(하다고 쓰고 영악이라고 읽자)한 선택으로 보인다. 


위의 문장을 해석해서 다시 써보면, 지금의 역사 교육은 비정상적이며, 지금의 역사 교과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국정화를 통해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와 같은 현상 분석은 어떻게 도출된 것이며, 이 괴상한 인과관계는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잘못된 역사 교육으로 청년들 입에서 '헬조선'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며 모든 것을 교과서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는 '헬조선'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부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무지를 광고하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정치의 실패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반세기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루내고,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지난 9월, 세계 160여개국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인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은 국가 발전을 염원하는 세계의 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영감과 비전을 제공하는 성공적인 모델이었습니다. 


→ 결국 핵심은 이것 아닐까?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됐다'는 <국제시장>의 세계관 말이다. 여기에는 산업화 세대들의 '나를 알아달라'는 인정욕구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라는 두 가지 축이 작용한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에겐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명예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지금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배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혼과 정신을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제대로 전파하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스스로 우리에 대한 정체성과 역사관이 확실해야 우리를 세계에 알리고 우리 문화를 세계 속에 정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해가고 있고 각국의 문화와 경제의 틀이 서로 섞여서 공유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알지 못하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고, 민족정신이 잠식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역사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과제이자 우리세대의 사명입니다.


→ 맞는 말이다. 그런데 두 가지가 걸린다. 우선, 박 대통령이 진정 저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의 역사 교과서는 그와 같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 운동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고, 일본이 주입했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와 달리 정부와 새누리당이 옹호했던 '교학사 교과서'는 어떠했는가? '뉴라이트' 사관에 의해 쓰여진 그 교과서는 탈민족주의적인 부분에선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을사조약을 '성공적'이라 표현하고, 쌀 수탈을 '수출'이라고 쓰는 등 '친일 사관'이라 불릴 만큼 일본 측의 입장에서 서술된 대목이 상당부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 동원에 대한 내용을 누락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이제 남은 것은 '교학사 교과서'를 집필했던 학자들 정도 아니겠는가? 역사학자의 90%가 좌경화 됐다는 주장도 어이가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머지 우경화된 10%가 쓴 교과서가 편향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됐든 자가당착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니냐는 말이다.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 그렇게 만든 당사자이자 주인공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통해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일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역사 왜곡이나 미화가 있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지만, 그런 교과서가 나오는 것은 저부터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청문회에서 '5·16 쿠데타'를 '쿠데타'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허언과도 다름없다. 지난 2008년 5월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이 제작했던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박 대통령은 축사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흥미롭게도 그 교과서는 5·16 쿠데타를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더 이상 왜곡과 혼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을 확립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지혜와 힘을 모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집필되지도 않을 교과서? 그렇다. 말 그대로 집필하지 않으면 된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 그렇다.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된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멈추면 된다. 말도 되지 않는 짓을 그만두면 된다. 브루스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도널드 베이커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대 교수 등 해외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 154명도 국정화를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역사에 단일한 해석을 적용해서는 '올바른'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의 추이만 봐도 국정화 '반대'가 더욱 탄력을 얻고 있다. 리얼미터, 한국갤럽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반대'가 '찬성'보다 10% 이상 많다.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벌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벌인 다급한 '쇼'인 셈이다. 정두언 의원을 비롯해서 새누리당 내에서도 이미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만큼,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더욱 초조해질 것이다.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배우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단일한 사관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비춘 역사를 통해 고민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자랑스러운 부분은 자랑스러운 대로 배우고, 부끄럽고 속상한 부분은 또 그대로 배우는 것이다. 역사를 배움에 있어 자긍심과 반성은 수레의 바퀴처럼 균형을 이뤄야 한다. 


이 균형을 깨려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역사 교육을 뿌리채 흔드는 일이다. 또, 민주주의의 근본인 다원성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이다. '국정화TF' 논란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진흙탕처럼 혼탁해진 국정화에 도대체 무슨 명분이 있단 말인가? 대통령의 오기와 아집만 남은 것 아닌가? 더 이상 정상의 비정상화를 범하는 우를 그만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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