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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들기가 살인까지.. '알쓸범잡'이 짚어본 보복운전

너의길을가라 2021. 6. 2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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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1일, 배에 통증을 느낀 임신부가 차량을 몰고 화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마음은 또 얼마나 초조했을까. 빨리 병원에 당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리라. 그런데 앞에 정차해 있는 차량이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운전자는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임신부는 얼른 출발하라는 뜻으로 경적을 살짝 울렸다.

배알이 꼬인 걸까. 이후 앞 차량 운전자는 진로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차선을 바꿔가며 앞을 가로막았다. 창문을 열고 병원에 가는 길이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보복운전은 그후로터 한참동안 멈추지 않았다. 며칠 후 이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난폭 김 사장'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돼 화제가 됐다. 그때부터 난폭·보복 운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됐다.

1999년 발생했던 '신혼부부 엽총 살인 사건'도 충격적이다. 결혼한 신혼부부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강원도로 차를 끌고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비포장도로에서 차 한 대를 추월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그 차에는 꿩 사냥을 가던 남성 2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추월 당한 것에 화가 났던지 방해 운전을 계속 하다가 급기야 엽총을 발사해 남편을 살해하고, 울부짖은 아내까지 죽인 사건이다.


지난 20일 방송된 tvN <알쓸범잡>은 경기남부를 여행지로 선택했는데, 첫번째 이야기 소재로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경기남부에서 유독 난폭·보복 운전 신고가 많기 때문이다. 2018년과 2019년 경찰에 신고된 사건만 3,547건에 달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서울로 출퇴근하는 차량이 많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은 낯선 단어였지만, 지금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뭘까. 난폭운전은 고의로 다른 사람의 교통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운전 행위를 일컫는다. 예를 들면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과속, 급제동, 안전거리 미확보, 정당한 사유 없는 소음 등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며 도로교통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보복운전은 운전 중에 자신에게 피해를 준 상대방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의도로 위협을 가하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것을 뜻한다. 행위는 난폭운전의 그것과 다를 게 없지만, 대상이 특정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명확히 상대방이 존재한다. 또, 형법에 의해 처벌받게 된다. '차량'을 '위험한 물건'으로 간주해 위협을 가했다면 특수협박죄, 상해를 가했다면 특수상해죄가 적용된다.

역시 좀더 문제가 되는 쪽은 보복운전이다. 실제로 보복운전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보복운전 신고 및 적발 건수는 2017년 4,431건, 2018년 4,425건, 2019년 5,536건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기소율은 2017년 55%, 2018년 43%, 2019년 41%로 감소하고 있다. 신고 자체가 늘다보면 그럴 수 있지만, 좀더 엄중히 사건을 다룰 필요는 있어 보인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고학력·고소득층이 보복운전을 더 많이 한다. <알쓸범잡>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손자인 구본성 아워홈 부회장의 보복운전 사건도 큰 화제가 됐었다. 지난해 9월 5일, 구본성 부회장은 서울 강남구 학동사거리 인근에서 운행 중 피해자 A씨의 차량이 자신의 차량 앞으로 끼어들자 욱하고 말았다. '감히?'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구 부회장은 피해자 A씨의 차량을 앞지르기한 후 급정거해 추돌 사고를 유발했다. 전형적인 보복운전이다. 구 부회장의 만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A씨가 차량에서 내려 '경찰에 신고했다'며 항의를 하자, 그대로 차로 들이받아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혔다. 특수재물손괴 및 특수상해혐의로 기소된 구 부회장은 지난 3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보복운전의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다양한 이유가 제시하고 있다. 운전 시간 장기화, 취약한 도로 설계, '빨리빨리'가 체질화된 문화,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 등이다. 박지선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운전대를 잡으면 목적지까지 반드시 최단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데, 이럴 때 자신의 속도를 늦추는 모든 자극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많은 운전자들이 함께 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운전이 승부를 가리는 경쟁으로 인식되면 양보는 곧 패배이다. 경쟁 사회에서 진다는 건 루저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견디지 못하고 앞지르기를 하며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또, 누군가 조금이라도 늦게 가거나 진로를 방해하면 이익이 침해됐다고 여겨 쉽사리 흥분하게 되게 된다.

또, 다른 운전자의 실수나 잘못을 본인이 처벌하고자 하는 경향도 보복운전의 원인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운전 능력을 과신하고, 타인의 운전 실력을 탓하는 인식도 영향을 미친다. 보복운전의 경우, 다들 피해자를 자처하는 건 그 때문이다. 게다가 자동차라는 익명의 공간에 있다보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여기게 되고, 이때 공격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처벌 강화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겠지만, 보복운전의 경우 대부분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발생하다보니 크게 와닿지 않는다. 박지선 교수는 2016년 4월 '난폭·보복운전의 원인과 해결책'이란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다른 운전자의 능력, 습관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운전자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장기적으로는 '빨리빨리' 문화를 바꿔 나가고, 운전 교육을 할 때 양보를 체질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도로 체계를 개선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로 위에서의 갈등을 모두 없애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가지 실천적인 팁을 제시하자면 '비상등 생활화'가 의외로 보복운전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옆차가 끼어들기를 해도 '미안하다'며 비상등을 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지는 경험을 한 적이 다들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보복운전 피의자들이 상대 운전자가 비상등이라도 켰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마음의 여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운전대를 잡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도로 위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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