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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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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5) 린토트 선생님 : 자,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럿지 군?럿지 : 정말 제가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해도 되나요, 선생님? 그래도 안 때리실 거죠?린토트 선생님 : 약속할게.럿지 : 저한테 역사를 정의하라고 하신다면 … 빌어먹을 일 하나 일어난 다음 또 빌어먹을 일이 이어지는 그런 빌어먹을 일의 연속이지요. - 앨런 베넷, 『히스토리 보이즈』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4)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게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3)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2)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운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왜 그렇지?""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봐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1) 모든 것이 과장입니다. 단지 그리움만이 진실이며 그리움은 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움의 진리까지도 그리움의 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모든 것에 대한 허위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엉뚱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다라고 내가 말할 때,그것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내가 내 살을 도려낼 때 사용되는 칼이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 카프카,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0) 배는 엔진의 힘으로 나아가지 않고, 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아는 힘으로 간다. 엔진은 동력을 생산해내지만 이 동력이 방향성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동력은 눈먼 동력일 뿐, 추진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엔진이 생산하는 동력은 이동의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여기에 방향이 부여되었을 때 이 잠재적 힘은 물 위에서 배를 작동시키는 현실적 추진력으로 작동한다.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그 앎의 힘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한다. 내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철새들이 태양의 기울기나 지구의 자장을 몸으로 감지해가며 원양을 건너갈 때 철새는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알지 못해도 천체가 보내주는 신호에 따라 방향을 가늠할 것인데, 인간의 몸에는 그 같은 축복이 없다. 그래..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39) 어느 벽보판 앞현상수배범 전단지사진 속에내 얼굴이 있었다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마침내 알았다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늙어버린 죄 - 정호승, 「어느 벽보판 앞에서」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38)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은 수천 년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그의 조국은 한 줄기 산세와 한 줄기 물길에 기대어 있던 부족구가였다. 위태로운 조국의 마지막 순간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조국을 떠난다. 그는 적국인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그가 버린 조국의 이름은 그의 악기에 실려 후세에 전해졌고, 그의 악기는 신라 천년의 음악의 바탕을 이루었다. 진흥왕의 팽창주의는 그가 남긴 순수비에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