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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의 중심에 선 언니들, 그동안 견뎌줘서 고마워요!

너의길을가라 2020. 11. 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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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 예능'은 해보나 보나 안 되는 일이었다. 남성 PD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예능계의 풍토가 그랬다. 애초에 기획조차 되지 않았다. 이른바 '남탕 예능'이 대세였고, 그 속에서 여성 예능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여성이 예능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홍일점(치어리더)'으로 소비되거나 남성과 '짝'을 이루거나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주역은 여성의 몫이 아니었다.

방송국들은 이 구조적인 문제를 여성의 문제('여성들은 재미가 없다', '여성들은 야외 예능에 적합하지 않다') 혹은 여성 예능인의 능력 탓('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갈 만한 여성 예능인이 없다')으로 돌렸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외부로 책임을 돌렸다. 대중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가뜩이나 주변부로 밀려났던 여성 예능인들은 아예 변방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됐다.

2018년부터 흐름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영자가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어 송은이가 아예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이어서 김숙, 박나래, 장도연 등 여성 예능인들의 활약이 이어졌다. 오랫동안 TV를 점령했던 '남탕 예능'의 걷어낸 '언니'들은 점차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 원동력은 솔직하고 당당한 매력, 진정성 있는 소통이었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강력한 추동력이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능판의 중심은 남성이었고, 대한민국은 남성들이 예능하게 좋은 세상이었다. 실수에 보다 관대했고, 웃음에도 좀더 너그러웠다. 지금도 '디폴트값'은 여전히 남성이 주축이 된 예능이다. 하지만 언니들의 출현은 계속 이어졌다. 2020년은 어땠을까. 여성 MC가 진행을 맡는 예능이 더 늘어났고, '여성 예능'이 그 어느 때보다 강세를 보였다.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박세리를 주축으로 여성 스포츠 스타로만 구성된 E채널 <노는 언니>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MBC <놀면 뭐하니?>가 제작한 '환불원정대'는 'DON'T TOUCH ME'로 각종 차트에서 음원 1위를 기록하는 등 예능계과 가요계에서 확실한 두각을 보였다. MBC <나 혼자 산다>는 아예 여성 멤버들로만 구성된 스핀오프 웹 예능 '여은파(여자들의 은밀한 파티)'를 띄웠다.

인기리에 종영한 tvN <식스센스>는 오나라, 전소민, 제시, 미주의 활약으로 시즌2를 바라보고 있고, 같은 시간에 편성될 <나는 살아있다>도 여성 멤버(김성령 김민경 이시영 오정연)로 캐스팅이 완료됐다. 안영미, 박소담, 솔라, 손나은이 출연 중인 JTBC <갬성캥핑>도 소소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즌2로 돌아온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노년 여성들(김영란, 문숙, 혜은이)의 인생 후반전을 다룬다.

2020년 예능판을 정리해보면 이영자, 송은이, 김숙, 박나래, 장도연, 안영미 등 기존의 여성 예능인들이 건재한 가운데 '다양한 언니들'을 내세운 신박한 예능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기획되고 있는 흐름이다. 더 이상 '여성 예능은 재미 없다', '여성 예능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편견은 발디딜 곳이 없어졌다. 여자들끼리'만' 놀아도 충분히 재밌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불안 요소는 존재한다. '환불원정대'는 뜨거운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지만 일회성 이벤트이고, <식스센스>는 유재석의 영향력이 컸던 프로그램이었다.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계속해서 제작되고 있지만, '인기', '간판'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조금 주저하게 된다. 여성 예능이 기존의 남성 예능처럼 장기적으로 안착하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점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애당초 도전의 여지마저 없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훨씬 나아진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시도와 꾸준한 기회를 통해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게 된다는 건 굉장히 큰 힘이다. 또, 여성 예능인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마음껏 펼쳐보일 뿐 아니라 꾸준한 활약을 통해 시청자들의 신뢰를 쌓아나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얼굴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자란 어떤 남자들은 그들이 당연히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이나 공간을 여자들이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한다. 그 공포는 우리가 문화적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워서 남자아이들이 더 이상 공공 영역을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지 않게 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세대의 여자들이 다음 세대의 여자들을 위해 견뎌야 할 시련이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p. 345)

여성에 관한 데이터 공백을 연구한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자신의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얼굴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자란"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공공 영역이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라면서 문화적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워나가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시대의 여자들이" 견뎌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새로운 얼굴들이 가세하면서 여성 예능은 침체기를 벗어나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 흐름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이 모든 공은 판을 바꾸고 척박한 땅에 싹을 틔운 이 시대의 여성 예능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좀더 견뎌주길 바라본다. 여성 예능이 성공하고, 여성 예능이 시대의 중심이 되는 양상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다른 '디폴트값'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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