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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 연예

'눈이 부시게'의 알츠하이머 반전, 판타지 기대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지금 바다는 어때요?"

"바다 위로 석양이 지고 있어요. 석양 때문에 하늘도 바다도 다 황금빛이에요. 바다가 꼭 미소짓고 있는 거 같아요."


JTBC <눈이 부시게>의 '할벤저스'들은 바다로 향했다. 버스가 얼마나 달렸을까.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눈부신 석양이 바다 위로 한껏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혜자(김혜자)의 지휘에 따라 홍보관의 대표 희원(김희원)의 음모를 막아내고, 지하실에 갇혀 있던 준하(남주혁)를 구출했던 '할벤저스'들은 각자의 '청춘'을 떠올렸다. 차창에 비친 그들의 젊은 시절이 황금빛 석양과 함께 찬란히 빛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눈이 부시게>의 놀라운 '반전' 말이다. '할벤저스'의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이 펼쳐졌던 홍보관 에피소드에서 짐작을 했어야 했던 걸까? 그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고, 의심스러운(?) 코미디였기 때문이다. 과장된 활극 뒤에 이어질 '출렁임'을 예측해야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눈이 부시게>가 갖고 있는 '미덕'의 일부라고 여겼다. '노년에 대한 애틋함' 말이다.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우리가 그 사람들 다 구할 수 있을까"


'할벤저스'들의 걱정과 달리 그들에겐 이미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몸이 늙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이 오히려 특정한 상황에서 능력이 됐고, 세월과 함께 체득했던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서 빛을 발했다. 삶은 헛되지 않았다. 할벤저스'들은 우려와 의구심을 떨쳐내고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역발상은 굉장한 통쾌감을 가져다 줬다. 사회 속에서 소외된 존재였던 노년이 히어로가 되는 장면들은 따뜻한 울림을 선사했다. 


'할벤저스'들은 바다에 닿았다. 황혼의 바다를 바라보며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에 대해 묻고 있는 걸까. 그렇게 먹먹함이 몰려올 때쯤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계 할아버지(전무송)가 혜자에게 시계를 건넸고, 혜자는 시계 뒷면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게 됐다. 그 순간, 혜자의 시간은 다시 뒤엉키기 시작했다.


혼란에 휩싸인 혜자 앞에 25살 혜자(한지만)가 상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스냅 사진처럼 떠오르기 시작했고, 끊어진 동영상마냥 재생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잊을 수 없었던 혜자의 삶이 거기에 있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엄마(이정은)와 아빠(안내상), 그들은 혜자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제야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혜자를 바라보던 안내상의 눈빛이 왜 그토록 비통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꾼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꾼 건지.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충격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턱이 아팠다. 아니, 턱이 아파 정신을 차린 걸까. 혜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었다. <눈이 부시게>가 '시간 이탈'을 다룬 판타지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25살의 혜자가 시계를 되돌린 탓에 그 대가로 젊음을 잃고 70대 할머니가 됐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10회 말미에 등장한 알츠하이머 반전은 너무도 놀라웠다.


드라마가 완전히 뒤집혔다. 10회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혜자가 만들어낸 기억의 조작이자 상상이었다. 이제야 <눈이 부시게>의 모든 장면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은 엉성하다고 생각했던 퍼즐이 완벽히 모양을 갖춰나갔다. 홍보관 구출작전의 과장된 활극은 단지 웃음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그 장면을 굳이 '반전' 앞에 집어넣은 까닭은 분명했다.  


세월과 늙어버린 몸의 무력함과 세월과 별개로 여전히 젊은 마음의 활기, 아마도 늙는다는 건 그 두 가지 이질적인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 채,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체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혜자와 '할벤저스'는 요양원에서 홍보관 구출작전과 같은 짜릿한 상상을 해보는 것으로 지금의 무기력한 현실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판타지'인 줄 알았던 이야기가 '현실'을 비추고 있었다. 늙어버린 혜자가 어떻게 25살의 혜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동화같은 반전을 기다렸던 스스로의 가벼움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관점과 시선이 바뀌자 모든 이야기가 달리 보였다. 누구에게나 늙음은 마법처럼 갑자기 닥치는 것이었고, 젊음은 잡히지 않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눈이 부시게>는 시간을 돌리는 시계라는 장치를 통해 노년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장을 열었고, 알츠하이머라는 반전을 통해 그 깊이를 더했다. 그동안의 드라마들이 알츠하이머를 전개를 위한 부수적 장치를 활용하고, 회화하하거나 가벼이 다룬 것과 달리 <눈이 부시게>는 시청자들이 그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들면서 보다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12부작인 <눈이 부시게>는 고작 2회 분량이 남아있다. 여전히 풀려야 할 비밀들이 남아있다. 혜자와 준하의 과거, 시계 할아버지의 정체 등이 맞춰져야 할 조각들이다. 또, 알츠하이머 증상을 자각한 혜자의 현재 이야기도 궁금하다. 다음 주 <눈이 부시게>가 자체 최고 시청률(8.447%)을 경신하고 눈부신 결말을 맺길 기대한다. 이토록 청정한 드라마를 마음 편히 볼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의 혼탁함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