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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을 한 판사, 고아라의<미스 함무라비>가 기대된다

너의길을가라 2018. 5. 2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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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주제의식을 가진 드라마는 많다. 따지고 보면 정의 · 진실 등 거창한 담론을 꺼내들지 않는 드라마가 없다. 시작은 창대하다. 그런데 중반이 채 지나기 전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고, 얼마 못 가서 결국 고꾸라진다. 차이는 '디테일'이다. 이야기의 힘을 끝까지 우직하게 끌고 나가는 힘은 그 세밀함에서 나온다. 세밀하다는 건 성실하다는 뜻이고, 그 정성스러움은 감동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JTBC <미스 함무라비>를 보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은 디테일이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법원이라고 하는 공간, 법관이라고 하는 직업, 판사라고 하는 사람을 이토록 정밀하게 다뤘다는 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그 설명들이 듣기에 좋았다. 다시 말해 거슬리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이해가 됐다. '生리얼 초밀착 법정 드라마'라는 소개가 헛투루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확실히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설명에는 실체적 힘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섣불리 알면 설명에 기름이 낀다. 본질과는 자꾸 멀어진다. 겉멋만 생긴다. <미스 함무라비>는 기존의 법정 드라마와는 확연히 달랐다. 끈끈한 찰기가 있었다고 할까. 궁금증이 생겨 드라마 정보를 찾아봤더니, 극본을 쓴 작가가 문유석이다. 낯익은 이름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손석희 앵커의 추천으로 유명한 『개인주의자 선언』을 집필한 현직 판사였다. 남달랐던 섬세한 디테일의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현직 판사가 드라마의 작가라니. 벌써부터 산뜻하다. 제3자의 눈으로 접근해 취재를 통해 얻어낸 것과 자신의 오랜 경험에 의거해 끄집어낸 것 사이에는 디테일에 있어 분명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대사들은 정밀했고, 생동감이 있어 '찰떡같이' 들렸다.



"재판은 정확도 중요하지만, 신속도 생명입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건에 매달리면 다른 사건 처리가 늦어질 수밖에 없어요. 정의도 한정된 자원이라고요."


"그래요, 임 판사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를 끝까지 밝혀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임 판사님 말처럼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거고요. 근데요, 그 기준이 단지 피해 금액뿐일까요?"


<미스 함무라비>는 세 명의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다. 합의부를 구성하는 세 명의 법관이 그 주인공이다. '세상의 무게를 아는 현실주의 부장 판사' 한세상(성동일), '섣부른 선의보다 원리원칙이 최우선인 초엘리트 판사 임바른(김명수),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꾸는 이상주의 열혈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 너무도 다른 세 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드라마의 중심이다.


당연히 이들은 부딪친다. 사사건건 부딪친다. 문제의 시발점은 박차오름이다. 그는 초임 판사답게 열정을 갖고 모든 사건에 임한다. 자료와 기록에 파묻혀 살고, 야근은 기본이다. 하늘 같은 '우배석(재판을 할 때에 재판장의 오른쪽 자리에 함께 참석함. 또는 그 자리.)' 임바른은 '평생 판사할 거 아니냐', '판사일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평생 묵묵히 달리는 마라톤'이라며 다그친다. 



또, 박차오름은 특유의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에 나선다. 아픔에 공감하고, 상처에 같이 아파한다. '괜찮냐'고 묻기도 하고, 함께 눈물을 쏟기도 한다. 때로는 동점심이 넘쳐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계속된 업무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사람'이 아니라 '증거'만을 좇았던 동료 및 선배들에게 깨달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잊고 있었던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손쉬운 합의를 이끌어내기보다 '당사자 본인 심문'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했던 박차오름의 고집을 통해 부장 판사 한세상은 초임 판사 시절 '잘 듣는 판사가 되라'는 선배의 조언을 떠올리게 된다. 임바른은 "법복을 입으면 사람의 표정은 지워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지워선 안 되는 거였는데.. 보지 못했다. 마음으로 보면 볼 수 있는 것을.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봐준 사람도 있는데."라고 스스로를 반성한다.



분명 <미스 함무라비>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서 있다. 어쩌면 감동과 신파의 경계인지도 모르겠다. 살인, 강간과 같은 흉악 범죄와의 싸움을 기대했거나 재벌 혹은 권력과의 대결을 기대했다면 <미스 함무라비>가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거대한 것'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소소한 삶 속에서 발견되고 발현되는 것이다. 


"법관의 의무는 세상을 바꾼다고 큰소리 치는 자들로부터 그 세상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는 임바른과 "최소한 시궁창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과 땅 위에 선 사람이 싸우고 있다면, 먼저 시궁창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부터 꺼내보려고 발버둥이라도 쳐보"려는 박차오름이 어떤 이야기를 그려낼지 궁금하지 않은가. 첫회 3.739%(닐슨 코리아 기준)에서 2회 4.553%. 껑충 뛴 시청률은 그런 기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의 마음을 보는 판사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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