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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부의 '모난 돌' 예찬론, 노무현의 '모난 돌'을 떠오르게 하다

너의길을가라 2016. 12. 2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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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난 돌이 정 맞는다

1. 성격이 너그럽지 못하면 대인 관계가 원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2. 너무 뛰어난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기 쉬움을 이르는 말.


사전적 의미가 실제 사용되는 '뉘앙스'와는 다른 말들이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그와 같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모난 돌'을 별난 성격, 뾰족한 성품으로 몰고간다거나 재능과 능력의 문제로 국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모난 돌'의 의미는 자신만의 스타일, 즉 '개성'을 갖춘 원석(原石)에 맞닿아 있다. 부딪치고 깨지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연마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존재. 그리하여 끝내 자신을 내려치는 '정'을 향해 단단한 목소리를 내뱉고마는 존재. '모난 돌'의 진정한 의미를 새기라면 그리 대답하겠다. 



SBS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 그러니까 부용주는 '모난 돌'이었다. 뛰어난 실력에 높은 도덕성까지 갖추고 있었던 그는 사사건건 병원 측과 부딪쳤다. 온갖 병폐로 물든 병원이라는 세상은 그에게 함께 타락(墮落)할 것을 권유했고, 자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찌든 병원이라는 세상은 그에게 굴종(屈從)을 요구했다. 도윤완(최진호)과 신현정(김혜은)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이라는 '정'은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부용주라는 '모난 돌'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용주는 깎고 깎여 지금의 김사부가 됐다. 


그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김사부에게 '모난 돌'을 찾아내는 안목이 생겼다고 한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줬을 테고, 그와 같은 감각은 본능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김사부가 윤서정(서현진)과 강동주(유연석)을 거둔 까닭도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자신의 정적(政敵)이라 할 수 있는 도윤완의 아들인 도인범(양세종)을 굳이 돌담 병원에 두며 가르치려 했던 이유도 그의 존재가 '모난 돌'이라는 것을 꿰뚫어봤기 때문이었다.



김사부는 도종완으로부터 은밀한 지시를 받은 채 돌담 병원에 머물렀던 도인범이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자, "진심이란 걸 말할 줄 모르는 거냐"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말이야. 두리뭉실한 돌보다는 모난 돌을 더 선호하는 편이야. 모가 났다는 건,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는 거니까. 그런 게 세상이랑 부딪치면서 점점 자기 모양새를 찾아가는 걸 좋아하지. 그냥 뭐, 세상 두리뭉실 재미없게 말고, 엣지있게, 자기의 철학, 자기의 신념이라는 걸 담아서 자기의 모양새로 말이야."


그리고 "난 네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며 병원에서 나갈 것을 명령한다. 포기이자 단념일까? 김사부는 도인범의 손을 놓아버린 걸까. 겉으로는 그리 보일 수 있지만, 이 '자극'이야말로 김사부식 가르침이자 이끎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통해 겹겹이 씌워져 있던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말이다. 강동주가 속물적인 출세와 성공의 유혹을 깨버리고, 자신의 진면목을 찾아낸 것처럼 도인범도 그리할 것이다. 그 바탕에 김사부라는 든든한 '모난 돌'이 버팀목 역할을 해주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든든하지 않은가. 문득 '노무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떠오른다.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에 대해 이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인 그리고 자연인 노무현이 걸었던 삶을 부정할 순 없다. 그야말로 우리 역사의 '모난 돌'이 아니었던가. 200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그가 남겼던 연설은 지금 읽어봐도 가슴이 뜨거워질 만큼 가히 명문이라 할 만하다. 누구보다 진보적인 정치인의 외침이자 대한민국 진정한 보수의 사자후(獅子吼)였던 그의 연설을 함께 읽어보자.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패가망신을 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가 남겨주셨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여전히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바람 부는 대로 눈치 보며 살라'고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김사부처럼 "세상 두리뭉실 재미없게 말고, 엣지있게, 자기의 철학, 자기의 신념이라는 걸 담아서 자기의 모양새로 살라"고 말할 것인가. 만약 내가 속한 직장에, 또 우리가 속한 사회에 '김사부'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정'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김사부'와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다. 


생각을 바꿔보자. 우리가 '김사부'와 같은 존재가 돼 새롭게 자라나는 '모난 돌'들을 품어주는 건 어떨까. 다양한 개성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고, 다른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해도 되는 세상. 자신의 모양새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치는 과정을 용납하는 넉넉한 세상. 더 나아가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우리의 역사를 이루려는 시도들이 이뤄지는 세상. 떳떳하게 정의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데 우리도 힘을 보태보는 건 어떨까. 우리, '엣지있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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