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다음 침공은 어디?>, 마이클 무어의 침공에 동참하고 싶다

너의길을가라 2016. 10. 2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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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차 대전 이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6년 만에 돌아온 마이클 무어는 단호히 말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차라리 군인들에게 휴식을 주고, 나에게 맡기라고 큰소리를 친다. 허걱, 농담이 아니다. 그는 정말 '성조기'를 들고 '침공(侵攻)'에 나선다.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는 그렇게 시작된다. 짐작했겠지만,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침공'은 땅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고전적 의미의 것이 아니다. 각 나라에서 가져오고 싶은 사회 제도를 훔쳐 오는 게, 바로 그가 말하는 '침공'이다. 빼앗기는 자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것을 내어준다. 마음껏 가져가라고, 당신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운 침공인가?



첫 번째 타깃은 '이탈리아'다. 마이클 무어는 그 곳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의 눈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항상, 방금 섹스를 나눈 것처럼 '달콤'해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노동자 계급의 한 커플과의 조우에서 마이클 무어는 입을 다물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이탈리아는 1년에 8주(6주 + 공휴일)의 유급 휴가가 보장된다. 결혼 휴가는 15일이고, 역시 유급이다. 출산 휴가도 남녀 공히 5개월씩 주어진다.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한 휴가는 다음 해로 적립된다. 아직 끝이 아니다. 회사의 점심시간은 2시간씩 제공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보니, 집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돌아와도 된다.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혜택들, 휴가, 훌륭한 점심시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죠?"


마이클 무어의 질문에 한 노동 조합장(組合長)은 '투쟁의 결과'라고 대답한다.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감옥에 수감되면서도 맹렬하게 투쟁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도들이 법제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섣부른 오해는 마시라. 이탈리아는 시간당 노동생산성 15위(2013년 기준)의 국가이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19위였다.) 마이클 무어는 당장 성조기를 꽂아 이탈리아의 휴가 제도와 "함께 웃으며 일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업 문화를 훔친다.



이런 식이다. 침공은 계속 된다. 다음은 '프랑스'다. 갑자기 '쿡방'이 연출되는데, 음식들이 죄다 고급지다. 최고급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하는 비주얼의 식당의 정체는 공립초등학교 급식실이었다. 프랑스의 학생들의 점심은 에피타이저에서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로 제공된다. 그들에겐 점심시간도 수업의 연장이다. 식사 예절을 배우고, 좋은 음식을 즐기는 과정을 통해 한 명의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당연히 무상급식도 포함된다)이 가능한 이유는 지난 40년 동안의 '증세'가 있었기 때문인데, 핵심적인 포인트는 그 세금을 미국처럼 허투루(국방비에 60%나 몰빵한다든지?)  쓰지 않고 복지에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성교육이 10대 임신률을 낮췄다며, 교육의 중요성으로 화두를 옮긴다. 다음 침공지는 '핀란드'다. 교육부 장관은 허술하게도 '기밀'을 술술 털어놨다. "숙제가 없다" 넋나간 표정을 하는 건 마이클 무어만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핀란드의 '교육관'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아이들에겐 '아이들이 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숙제(homework)라는 말은 구시대적인 말이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은 충격적으로 들린다. 아이들에겐 방과 후에 집에 가서 할 일이 많단다. 놀아야 하고, 스포츠도 즐기고, 악기도 연주하고, 독서도 해야 한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야 하고. 와우!




핀란드의 교육에는 '숙제' 말고도 없는 게 또 있다. 객관식 시험이 없고, 표준화 검사가 없다. 또, 입시 위주의 교육이 없다. 수업은 빵을 굽고, 노래를 하고, 예술을 배우는 다양한 활동들로 채워져 있다. 공립 학교를 중심으로 평준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학교=가까이 있는 학교'라는 등식이 성립돼 있다. 교육의 중심은 철저히 '학생들'에 맞춰져 있고, 어른들은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핀란드의 한 학교를 찾아간 마이클 무어는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들이 나눈 대화를 살짝 엿들어보자.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해요."

"행복을 말하시는 건가요?

"네"

"뭘 가르치시는데요?

"수학이요"

"수학 선생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학생들이 졸업 후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거예요?"

"네"

"수학 선생님이시라고요?

"네"


'행복'을 말하는 수학 선생님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또 한명의 교장 선생님은 마이클 무어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사회성을 기르고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한 시기가 언제겠습니까? 학교를 떠나면 사회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학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이보다 명쾌한 대답이 또 있을까. 여전히 핀란드의 교육 시스템을 믿을 수 없는 마이클 무어는 재차 질문한다. "그들이 놀길 원합니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네, 그렇습니다" 깃발을 꽂아 '침공'을 선언하는 마이클 무어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정말이지 훔쳐오고 싶지 않은가?



이어서 마이클 무어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빚을 진 청년이 없는 슬로베이나, 평일 2시에 퇴근하고 개인적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들의 독일, 마약 소지와 복용을 처벌하지 않는 포루투갈(마약을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다), 복수가 아니라 재활에 초점을 맞추는 형벌 제도를 가진 노르웨이까지 숨가쁘게 달려가 '침공'에 성공한다. 그 다음에는 '여성성'에 주목한다. '재스민 혁명' 이후 실질적인 성평등을 이룬 튀니지, 미국에서 시작된 2008년 금융위기 때 부실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강력히 처벌했던 아이슬란드(마이클 무어는 당시 여성들이 경영했던 은행만 건재했던 사실을 상기시킨다)까지.


흥미로운 건, '침공'을 당하는 이들이 '미국인' 마이클 무어에게 어김없이 하는 공통적인 질문이다. "이거? 원래 당신들 것이었잖아!" 그제서야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세대가 대학을 거의 무료로 다녔단 사실을 떠올렸고, 노동절이 시카고에서 시작됐으며, 휴가 제도도 미국의 노조에서부터 비롯됐음을 생각해냈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벌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미국의 것이었다. 영어권 국가 중에서 최초로 사형제도를 없앤 곳이 미시간 주였으니까. 구대륙의 폐단을 맹렬히 비판하던 신대륙의 기상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애초에 품고 있던 이 창의적인 발상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던 말인가. 



영화의 말미에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아이디어를 훔치기 위해 침공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 것이었다. 우리는 그저 분실물 보관서로 가면 된다." 과연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어쩌면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벽'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영리한 마이클 무어는 독일 친구를 만나 '베를린 장벽'를 걸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그 누구도 붕괴되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베른린 장벽'이 어느 순간 '뻥'하고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해결책은 하나였다. 망치를 들고 부셔버리는 것. 한 사람의 망치질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고, 이어 동참한 수많은 군중들에 의해 작은 구멍이 만들어지면 끝내 '벽'은 허물어진다. 2009년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 제작 이후, 변하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던 마이클 무어도 잊고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외쳤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말이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보여주는 각 국가들의 모습들은 '단편적'이다. 다분히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높은 실업률과 같이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임무는 잡초가 아니라 꽃을 따가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것은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자, 우리도 망치 하나 들고, 마이클 무어의 유쾌한 침공에 '가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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