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고산자 : 대동여지도>는 왜 망할 수밖에 없었을까?

너의길을가라 2016. 9. 1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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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 편의 영화가 망(亡)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제작비가 100억 원(120억 원이라는 보도도 있다)에 달한다면, 그 아픔은 평소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고산자 : 대동여지도> 이야기다. 손익분기점은 270만 명. 12일까지 33만 2,066명. 같은 날 개봉한 <밀정>은 237만 931명으로 쭉쭉 치고 나갔다. 이 대결의 승패를 가리는 게 무색할 만큼 완패다. 



지난 주말 동안 (다른 대작이 없는 터라) 제법 관객을 불러 모으며 박스오피스 2위에 올라 있지만, 누적 관객 수가 늘어나는 속도가 현저히 더디다. 당장 <매그니피센트 7>의 개봉(이미 오늘부터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이 예고돼 있어, 이대로라면 성적이 더욱 처질 것은 뻔하다. 가족 영화'라는 특성을 내세워 추석 시즌에 관객 몰이를 하고, <아수라>가 개봉(9월 28일)하기 전까지 버티는 것이 최선이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라는 소재, 박범신의 <고산자>라는 원작, 강우석 감독과 차승원의 만남. '성공'을 위한 여러 조건들이 갖춰졌음에도 이와 같은 처절한 결과에 봉착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단순히 경쟁작인 <밀정>의 기세에 눌렸던 걸까? 직접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야 분명한 답을 찾았다. <고산자 : 대동여지도>는 왜 망할 수밖에 없었나.



서사는 느슨하고, 전개는 집중력이 떨어진다. 차승원의 분전이 눈에 띄지만, 갈 길을 잃은 열연은 애처롭기만 하다. 상상력은 빈곤하고, 갈등은 지루하다. 비극성은 손쉽게 과잉으로 치닫는다. 이른바 '아재 개그'로 관객들을 웃기려 들고, 뒤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겠다는 '속셈'이 뻔하다.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단편적으로 늘어놓는다면 이 정도일 것이다. 분명, '초반 10분'의 분위기만큼은 대작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초반 10분', 고종과 대원군의 행차에 몰래 끼어든 김정호는 기리고차(記里鼓車)를 통해 지도 상의 표시된 직선 거리와 실제 거리의 오차를 확인한다. 산수(山水)와 풍광(風光)이 절묘한 조선 팔도의 '길'을 누비는 김정호의 여정과 웅장한 음악들이 어우러진다. 홍경래의 난의 진압군으로 투입된 아빠가 잘못된 지도 때문에 산 속에서 동사한 장면을 지켜보는 어린 김정호의 모습으로 전개된다. 이 묵직한 전개는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여놓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김정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여주댁(신동미)와 딸 순실(남지현), 바우(김인권)을 만나게 되면서 극의 긴장감은 극격히 다운된다. '인간 김정호'를 그리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하지만, 전형적인 주변 인물들을 끼워넣음으로써 오히려 '인간 김정호'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김정호와 바우가 주고 받는 '아재 개그'는 <삼시세끼> 차승원의 이미지를 울궈먹으려는 일종의 편법처럼 보인다.


연출에 있어서도 아쉬움은 드러난다. 가령, 경쟁작인 <밀정>을 예로 들어보자. 김지운 감독은 항일 투사들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서 과감하게 스윙재즈 음악을 넣어버린다. 슬픈 장면에서 굳이 슬픈 음악을 덧대 관객들에게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반면, <고산자 : 대동여지도>는 (불필요하게 집어넣은) 비극성을 '과잉'으로 몰아 넣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넘칠 정도다. 오히려 슬픔은 희석되고 만다. 강요된 슬픔은 감정적인 동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절대 식민사관이 아니다"


강우석 감독이 김정호에 덧입혀진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건 영화 속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하지만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해 지리서와 지도가 편찬됐던 초기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문화적 · 산업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지도들이 편찬됐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간단히 외면한다. 특히 서양식 지도가 전해지면서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기에 이르고, 실학의 발달에 따라 이런 흐름은 더욱 강화됐다. 우리의 생각보다 조선 후기는 훨씬 더 고차원적인 시대였다.


물론 <고산자 :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마냥 '걷고 걸어' 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도들을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김정호를 실학자의 모습으로 그리기보다는 기존의 인식의 틀에서 머문다. 영화 속에서 김정호는 과학적 사고에 근거한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지도밖에 모르는' 광인(狂人)에 가깝다. 그래서 김정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신화 속에서 살아간다. 이 간극을 줄이지 못한 강우석 감독의 접근은 아쉽다. "지도를 구할래요, 나를 구할래요?" 이 진부한 물음은 끝내 김정호를 침몰시키고 만다.


"교육적으로도 중요하고 존경할 인물을 왜 표현도 안 하고 가르치지도 않나. 김정호 선생의 애민 사상이나 업적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싶었다. 단 너무 교육적이면 안 되니까 허구를 넣어 강조하는 것이다." (<티브이데일리>, '고산자, 대동여지도' 강우석, 투박함 속에 담긴 진심)


강우석 감독의 '선의'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 영화적 내용에는 혹평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계몽'에 대한 강박이 너무 짙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제 나라 백성을 못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라는 김정호의 외침 등 <고산자 : 대동여지도>에는 고민해 봐야 할 지점들이 여럿 눈에 띄지만, 영화적으로 '재미있다', '잘 만들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오히려 '김정호'라는 훌륭한 소재를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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