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묻는 입

'광복절'이라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 우리 앞에는 무엇이 남았나

너의길을가라 2016. 8. 1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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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돼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기념했다. 정부는 원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하기도 했고, 대통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건국절 축사 같은) 광복절 축사'로 국민 앞에 나타났다.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광복절'과 관련한 기사들을 1면에 싣어 스스로의 '민족애(民族愛)'를 뽐냈다. 국민들은 어떠했는가. 역사의식이 부재한 한 연예인을 향해 분노의 철퇴를 내렸다.


본래 무언가를 맞이할 때는 떠들썩하기 마련이다. 또, 그 '맞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나간 다음이 중요하다. 몸과 마음을 적시고 있던 흥분이 가신 후에야 우리는 제대로 '응시(凝視)'할 수 있다. 제71주년 광복절이 지나간 자리의 풍경을 되짚어보는 건 제법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청명함'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정부도, 언론도, 국민도 이쯤이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길 이 시점에서 다시 광복절을 차분히 이야기하자.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을 앞두고 원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유족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김영관 전 광복군동지회장은 박 대통령의 면전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며 '건국절 제정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대한민국은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탄생했음은 역사적으로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그의 뒤이은 발언은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에도 보수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건국절 제정론'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비호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당시 김영관 전 광복군동지회장의 일갈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한 채 외면당했다. 예상치 못했던 발언에 당황했기 때문인지,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때문인지 박 대통령은 사드 배치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이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박근혜 대통령)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건국절에 힘을 실어줬던 박 대통령은 올해 경축사에서도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못박았다. 이쯤되면 광복절 경축사인지 건국절 경축사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의 바람은 허무하게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거기에 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인 뤼순 감옥을 하얼빈 감옥으로 잘못 언급하는 '실수'를 저지르며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장소'를 틀린 것이 뭐 대단한 잘못이냐고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와 함께 과거 걸그룹 AOA의 실현과 지민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그 이름을 매칭시키지 못해 국민적 공분을 사야했던 사건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사인(私人)에 불과한 연예인의 역사 인식과 대통령의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을 어찌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가 '건국절 논란'과 함께 맞물리면서 더욱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 결국 박근혜 정부가 자초한 일이다.



한편, 국민들은 광복절을 소녀시대 '티파니'가 일으킨 태풍과 뒤엉켜 보냈다. 지난 14일 티파니는 일본 도쿄에서 'SM타운 콘서트'를 마친 후 멤버들과 함께 한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는데, 그 글에 일장기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는 범위였겠지만, 광복절인 15일 전범기(戰犯旗)인 일본의 욱일기(旭日旗) 무늬가 포함된 '도쿄 재팬'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사진을 게시한 건 선을 넘는 행위였다. '광복절에 전범기가 웬말이냐'는 분노와 함께 티파니 개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급기야 그가 꼴보기 싫었던 사람들은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 측에 티파니의 하차를 요구하고 있다.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티파니는 자필로 사과문을 작성하는 등 고개를 숙였지만, 이번에는 그 사과의 '진정성'을 놓고 또 다른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덫'에 빠진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한 명의 연예인에게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사소한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씁쓸한 현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한쪽에서는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이 '광복절'에 '건국절'을 은근슬쩍 올려놓는 대범한 역사적 장난을 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이 한 연예인의 역사의식 부재를 놓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것이 제71회 광복절이 지나간 후의 풍경이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정작 관심이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대한민국에 와서 아버지 고향에 가니까 많은 유공자 유족들이 내 손을 잡고 대한민국이 우릴 버렸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직접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와닿아…" (독립유공자 후손 권명철 씨)


"국민 여러분, 우리가 지금껏 위로금 받겠다고 이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돈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 어렸을 적 끌려가서 그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위로금 몇 푼 준다고 용서가 되겠습니까. 사죄하는 말 한마디 없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김복동(91) 할머니)


한 연예인을 조리돌림하고 난 감정적 소비 이후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보수 진영이 주도하고 있는 건국절 제정론은 앞으로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고, 반지하 월세방에서 하루를 견디며 겨우 버티고 있는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의 삶은 바뀌는 게 없을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이 출연(出捐)하기로 한 '10억 엔' 앞에 40명만이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의 슬픔은 또한 잊힐 것이다. '광복절'이라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 우리 앞에는 이런 것들이 남아 있다. 청명한 하늘을 보고 싶었으나, 비바람에 부서지고 뒤집힌 우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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