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덕혜옹주>, 그를 지키고 싶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너의길을가라 2016. 8. 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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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들춰보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역사의 굴곡을 살펴보고 있자면 심리적인 괴로움이 몰려 온다. 마음 둘 곳이 없다. 느긋하게 쉬어갈 틈이 없다. 쇠락(衰落)의 기운과 함께 절망이 흐르고, 눈물과 분노가 솟구친다.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물들의 삶이 안쓰럽기만 하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그 가운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이자 잊힌 이름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가 있다. 고종이 환갑의 나이에 얻은 고명딸(아들 많은 집의 외딸)인 덕혜옹주는 황실에서 태어났기에 그 존재 자체가 '정치적 도구'로 기능한다. 일제와 친인파들은 덕혜옹주를 이용해 자신들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하고, 그 정치 게임 속에서 덕혜옹주는 비운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는 고종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14살의 나이에 강제로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살아야 했고,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왕족'의 귀환을 불편하게 여긴 이승만에 의해 귀국이 거부당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한편, 그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마치 나라를 빼앗긴 무능한 군주와 열강의 야욕 속에서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비운의 황제 사이에서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의 아버지 고종처럼. 



"이 아이가 바로 내 딸이오. 요즘 이 늙은이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건 이 녀석뿐이라오. 얘야, 어서 각하께 인사 올리거라." (고종은 덕혜옹주를 입적시키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에게 인사를 시킨다)


그에게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적 존재였다는 평가와 일생을 소극적인 태도로 옹주였다는 시선이 교차한다. 일제가 덕혜 옹주를 애써 일본으로 옮기려 했던 까닭이 그가 고종 황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왕녀였다는 점에서, 또 일본 왕족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 한국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덕혜옹주>는 '덕혜옹주'의 삶을 조곤조곤 설명하는 한편, '인간 이덕혜'를 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상상력을 오가지만, 그 각색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허진호 감독은 애써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담담한 시선을 유지한다. 손예진은 '이덕혜'가 되어 그 삶의 무게를 오롯이 견뎌낸다. 최근 그가 쌓아올린 필모그래피를 통해 입증된 연기력은 완전히 경지에 오른 듯 보인다.



'허진호가 시대극을 만든다고?' 영화를 보기에 앞서 감독 허진호에 대한 의구심은 '덕혜옹주'와 '이덕혜'가 만나는 지점을 절묘히 묘사해낸 '섬세함'에서 완전히 해소됐다. '멜로 영화'라는 좁은 폭 안에 갇혀 있던 허진호 감독은 '휴머니즘'이라는 카테고리로 <덕혜옹주>를 끌어올린다. 거기에는 '김장한(박해일)'이라는 인물이 큰 역할을 감당한다. 


고종의 부마로 내정되기도 했던 김장한은 덕혜옹주를 지키는 데 자신의 인생을 건다. 영화 속에서는 독립 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고 싶다며 부마 자리를 거절하는 것으로 각색됐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고종의 덕혜옹주 약혹 작전을 눈치채고 시종 김황진(안내상, 김장한은 김황진의 조카)을 내쫓으면서 실패로 귀결된다. <덕혜옹주>는 두 사람의 사랑과 연민을 영화 속의 중요한 축으로 활용한다. 허진호의 장기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손예진과 박해일, 두 주연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동시에 백윤식, 라미란, 윤제문, 정상훈, 박주미 등이 가세한 조연진은 탄탄한 연기력으로 극의 무게감을 더한다. 특히 라미란은 덕혜옹주를 모시는 궁녀이자 타지 생활 속에서 그의 유일한 동무였던 복순 역을 맡아 웃음과 눈물을 넘나들며 뜨거운 존재감을 과시한다. <덕혜옹주>에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라미란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덕혜옹주>는 제목처럼 덕혜옹주, 이덕혜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비극적인 삶은 영화의 큰 울림이 된다. 그러나 삶이 비극이었던 사람이 어찌 덕혜옹주뿐이겠는가. 사실 이 영화는 덕혜옹주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덕혜옹주로 상징되는 '조선(혹은 대한제국, 어쩌면 대한민국까지)'을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덕혜옹주>는 '덕혜옹주'에게 불행한 나라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고종(백윤식)과 어머니 양귀인(박주미)의 이야기다. 또, 그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김장한과 복순의 이야기다. 또, 독립을 위해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김황진의 이야기이자 한인애국단의 김봉국(김대명)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라 잃은 설움과 비참함에 하루를 견뎌야 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이야기다. 그것이 우리가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꼭 봐야 할 이유다.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한마디 덧붙이자면, 반공영화라는 타이틀을 뒤집어 쓴 애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흥행 돌풍 속에서 또 다른 '민족주의'를 다룬 <덕혜옹주>의 개봉은 흥미로운 대결 구도로 다가온다. 화려하고 강렬한 <인천상륙작전>과는 달리 잔잔한 파도를 닮은 <덕혜옹주>가 '천만 영화'를 노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다만, 상업 영화'의 틀 속에서 '덕혜옹주'라는 인물을 훼손시키지 않고 표현한 점은 돋보인다.



2016. 8. 1. CGV 스타 라이브톡 스크린 중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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