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폭염 속 버스에 8시간 갇혔던 아이, 매뉴얼이 유명무실한 사회의 민낯

너의길을가라 2016. 7. 3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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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행 종료 후에는 차 안을 맨 뒷좌석까지 반드시 확인해 어린이 혼자 통학버스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한다."


광주시 교육청이 지난 2월 모든 유치원에 보냈던 매뉴얼 내용의 일부다. 그 목적이 뚜렷하고, 내용이 명징하다.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만약 이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4세 아이가 35.3도의 폭염 속에 밀폐된 버스에 갇혀 8시간 가량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열사병 증세를 보인 그 아이는 의식을 잃고 탈진한 채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의식불명 상태다.



차량 내부 온도는 60~70도까지 치솟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이라고 해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볕더위, 찜통더위, 용광로..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열기 속에서 고통스러워 했을 아이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유치원 원장과 인솔교사, 통학버스 운전기사는 업무상과실 혐의로 불구속 입건 됐다.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렇듯 답은 간단하다. '매뉴얼을 지켰어야지!' 겨냥은 쉽다. 비난의 화살은 수월히 대상을 찾아낸다. '매뉴얼만 지켰으면 되잖아!' 그 원론적인 당위를 가지고 누군가를 훈계하고 힐난하고 책망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세월호'가 그랬고, '메르스'가 그렇다. 그 사고(事故)들은 기본적으로 있는 매뉴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사고의 최전선에 있었던 '개인'들에게 가차없이 손가락을 흔들고, 그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말끔히 정리된 것일까. 그 응징에 동참해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 군중 속에 섞여 심리적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달라질까?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현상'은 변형된 또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괴물'처럼 나타날 것이다.




저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되돌아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매뉴얼'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매뉴얼'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대답이 쉽지 않다. 혹시 현장에서 매뉴얼을 언급하며, 매뉴얼 대로 하려는 동료를 마뜩지 않게 쳐다본 적은 없는가? 이렇듯 실제로 현실 속에서 '매뉴얼'은 광주의 어느 통학버스에서처럼 유명무실하다. 


"운행 종료 후에는 차 안을 맨 뒷좌석까지 반드시 확인해 어린이 혼자 통학버스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한다"는 매뉴얼은 왜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는가. 인솔교사도 버스기사도 뒷좌석에 아이가 남아 있을 거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안전사고라는 것이 매번 그런 근거없는 확신에서부터 비롯되지만, 현장 속에서 이런 사태를 방지할 매뉴얼은 '굳이', '뭐, 그렇게까지', '됐어'라는 말과 함께 붙어 다닌다.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건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혹은 '감찰'을 받을 때 정도가 아닐까? 


아, 무려 A4 용지 140여 장에 달한다는 정일선 현대 비앤지스틸 사장의 '갑질 매뉴얼'은 좀 달랐었다. "모닝콜은 받을 때까지 '악착같이' 해야 함, "일어났다, 알았다"고 하면 더 이상 안 해도 됨"에서 시작해서 정일선 사장의 속옷과 양말의 각을 잡는 데까지 세세히 규정된 이 역겨운 매뉴얼만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현실감' 있게 적용되고 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한편, 매뉴얼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함께 따라야 한다. 가령, 구의역에서 안전문을 점검하다 숨진 한 청년의 죽음은 '2인 1조 정비'라는 지켜질 수 없었던 공허한 매뉴얼 탓이었다. 이 사고는 개인의 과실에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외주 계약에서 비롯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 환경 등을 근원적인 배경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매뉴얼을 지킬 수 없는 사회, 매뉴얼을 지키는 것이 '융통성 없음'과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사회. 그것이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민낯이다. 각종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매뉴얼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매뉴얼 대로 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뉴얼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모가 일상이 된 나라'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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