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어김없이 돌아온 스승의 날, 다시 한번 '교권'에 대해 생각하다

너의길을가라 2016. 5. 14.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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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선생님들이 존경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선생님들께서 자긍심을 갖고 자기계발과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다."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35회(34회가 아니다!) 스승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석이고, 역대 대통령으로 따져도 두 번째다. 헷갈릴 것 같아서 다시 정리하자면, 스승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 한 명뿐이다. 갑자기 스승의 날을 챙기기 시작한 건 무슨 까닭일까? 58만 명에 달하는 교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일까,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의 '행동'과 '말'은 '계산'된다. 그동안 그 어떤 대통령도 찾지 않던 스승의 날 기념식에 '작년'부터 발길을 두고 있다는 건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박근혜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자유학기제'와 '국정 교과서'에 대한 짙은 의도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고,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교권'을 어루만져야 할 까닭도 있을 것이다.



"교권 바로세우기는 교육 현장의 질서와 윤리를 회복하여 국가 사회의 미래를 바로 세운다는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


번드르르한 말이 공허하다. '국가 사회의 미래'부터 '신념'까지 등장한다. 추진해 나가겠다고 '약속'했지만, 늘 그렇듯 그의 약속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물론 교권을 바로 세우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와도 같다. 누가 교권이 무너지는 것을 반기겠는가. 다만, 한 가지 질문, 원초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는 있다. 교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교권을 '어떻게' 바로세울 것인가?


교권(敎權) :교육자로서의 권리나 권위.


교권이 추락했다고 한다. 현장을 모르는 필자로서는 그 말을 언론이나 지인들을 통해 '엿'들을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언론에서는 '선생을 때리는 학생'이라는 자극적인 내용들로 '교권의 추락'을 이야기한다. '학생인권조례' 탓에 학생들의 기만 살았다는 기사들도 자주 보인다. 이대로는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마치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인권이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여기는 듯 하다.


반면, 진보적인 시각을 견지한 언론에서는 조례 제정으로 학생들의 '자율성'이 성장하고 있다면서도, 그럼에도 학교 안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실은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물론 한 쪽에 진실이 있고, 다른 한 쪽에 거짓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양 쪽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듣고, 그 안에서 '중도'를 찾는 것이 진실에 근접하는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과연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인권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선생님의 그림자만 봐도 고개를 조아렸던 옛날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보이는 대로 집어서 보이는 대로 팰 수 있었던 과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교권'이 추락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제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전히 일부 학교에서 체벌이 이뤄지고 있지만, 무지막지하던 시절과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학교 내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과거에는 스승의 권위에 알아서 침묵했다면, 이제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라야 한다. 시대가 달라졌고, 달라진 시대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과거의 학생들과 다르다.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스승'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뿐인지도 모르겠다. 


매로 다스리는 방법은 쉽다.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고지'할 필요도 없었다. '엎드려 뻗쳐'와 시원한 스윙이면 끝이었다. 고함을 치고 무력을 사용해서 공포심을 조장하면 학생들은 쉽게 억압된다. 그들이 말하는 '교권이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 취급하고, 대화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기보다 '명령'으로 일관했던 시절 말이다.




이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당선'되기 시작하면서 교육 현장은 급변하고 있다. 아니, 교권이 살벌하게 살아있던 시절을 몸소 겪었던 그 시절의 학생들이 어른이 되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물려주길 거부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변화다. '체벌을 하지 말라고? 그럼 어떻게 아이들을 지도하나요?'라고 묻는 교사들에겐 '끔찍한' 변화일 것이다.


이제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을 '대상'에서 '인격체'로 대하는 인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매를 들 수 없고, 명령을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설득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이해시키고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자율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를 교육한다. 그렇다, '선생질' 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과거에 안주해선 '스승'이 될 수 없다. 학생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철학, 그리고 '신념'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여러가지 양상이 발생하는 '지금'은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객체'에 머물렀던 학생들이 '학교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 자리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걸 견디지 못하고 '교권이 추락했다'며 '선생 짓을 못해먹겠다'는 교사들이 나오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는 일 아닌가? 다시 몽둥이를 들고, '이건 사랑이다'라고 할 셈인가? 그래야 말을 잘 들으니까?


'교권'은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몽둥이를 들고 소리를 치고 명령이나 일삼는 그런 '교권'은 추락해도 된다.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교권'의 진짜 모습은 다른 데 있다. 거기엔 양심이 있는 교사의 고민이 녹아 있는 '교육'이 있다. 또, 교사와 학생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 간의 '신뢰'가 있다. 만약 정부가 혹은 박근혜 대통령이 교권을 바로세우고자 한다면 그 두 가지에 천착할 일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같이 교육을 원천적으로 파괴하는 일을 통해 무너지는 교권을 어찌할 것인가. 박 대통령은 스승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교사들의 자긍심을 고취한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국정화 철회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교사들을 표창에서 제외했다. 다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배제'하고 심지어 '교편'을 빼앗기까지 하는 것이 과연 교권을 바로세우는 일일까?


또, '기업 마인드'가 장악한 상아탑들은 교사들을 구조조정의 먹잇감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취업'이 '교육'을 잠식한 대학교에서 더 이상 교사가 설 교단은 없다. 장사꾼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흐름에 힘을 보태고 있는 정부가 '교권'을 이야기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 아닌가. 재단의 비리를 폭로하고 직위해제된 교사들은 또 어떠한가.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는 그들을 외면하는 정부는 과연 교권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가. 교육부는 사학비리에 대한 감시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과거처럼 교권존중과 스승존경 풍토가 사회로부터 저절로 부여되는 시대는 지났다. 교단에 처음 섰을 때 설렘을 간직하고 봉사와 인성교육을 실천하는 선생님, 열심히 연구하는 선생님 상을 우리 사회에 보여주자" (박찬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직무대행)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교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교사'와 '스승'을 동의어로 취급해 왔던 것은 아닐까? 스승이란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는 이 땅의 수많은 교사들이 '스승'되기를 바란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서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물론 그 전달자로서의 역할은 최소한이다. 학생들을 '대상'이 아니라 '인격체'로 대우할 때, 참다운 교육이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고삐를 잡고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로 돕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의 교육 현실 속에서 그것이 어렵다고 '현실을 모르는 소리 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대로는 안 되겠기에 이대로 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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