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묻는 입

건국대통령 이승만, 영화 제작? 내가 알고 있는 이승만은..

너의길을가라 2014. 2.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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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서세원, 이승만 대통령 영화 연출..4년만의 복귀 <스타뉴스>


'이승만 영화' 제작?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일, 이승만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는 뉴스가 전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몇 가지 간단한 사실들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간단히 짚어보자면 제작은 애국프로덕션에서 맡았고, 코미디언 출신 영화감독 서세원 씨가 연출을 담당할 것이고,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된 상태라고 한다. 또, 13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영화 시나리오 심포지엄'을 열고, 영화의 내용 및 주제를 밝힐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이제 첫발을 내딛는, 부푼 꿈에 가슴 설렐 영화 관계자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할 것 같다. 불편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잘 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말이다. 우선, 영화 제목은 반드시 손질을 하길 바란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영화 제목이 '건국대통령 이승만'이라는데, 무슨 60, 70년대도 아니고 이런 '구린' 제목으로는 관객에게 100% 외면 당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하자면, 가능하면 '감독'도 바꾸길 바란다. 2004년 '도마 안중근', 2010년 '젓가락'의 실패는 우연이 아니다. 물론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다음 번의 도전에도 반드시 실패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기능인 연출의 능력에 관한 문제다. 


기왕 영화를 만들려면 성공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투자자들이 돈이 남아돌아서(그럴 가능성도 있다) 영화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필자의 조언에 조금은 귀를 기울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가지 제안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영화가 흥행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 <노컷뉴스>에서 발췌 -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든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캐릭터)이 갖고 있는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은 영화로 제작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인가? 관객들의 마음을 훔칠 만큼의 흡입력을 가진 인물인가? 굵직하거나 혹은 다채로운 이야깃거리가 풍부한가? 마지막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강렬히 '조응(照應)'할 수 있는 교집합이 존재하는가? 


이승만은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이는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해방 전후, 조선의 대표적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광복 직후 <매일일보>에서 조사한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에서 무려 3위에 올랐을 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참고로 1위는 여운형, 2위는 김구였다.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암살'을 당했고, 그 배후로 이승만이 지목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만큼 다양한 이야깃거리도 갖고 있다. 다만, 한 가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승만이라는 인물과 현재의 우리가 영화를 통해 만날 이유'다. 이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과 같은 흥행 대박은 결코 꿈꿀 수 없다. 


앞으로 서세원 감독이 만들어 나갈 '건국대통령 이승만'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 서세원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한 만큼 그에 앞서, 필자가 알고 있는 이승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하고자 한다.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소개한다.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공산화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다고 말한다. 사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지만, 그나마 동의 가능한 것들은 이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한 것은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 아닌가? 



- <연합뉴스>에서 발췌 -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대전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 다리에는 피난민들로 가득차 있었고(약 4000년여 명으로 추정), 이들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사망자는 약 600~800명으로 추정) 미처 다리를 건너오지 못한 사람들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납북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당시 이승만은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기만적인 라디오 방송을 하며 국민을 속였다. 



- <노컷뉴스>에서 발췌 - 


기왕 말이 나왔으니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으로 경남 거창에서 양민 500명이 공산군으로 오인돼 국군에 의해 사살당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1년 2월 11일)과 1·4 후퇴 기간동안 무려 약 30만 명이 사망했던 '국민 방위군 사건'(1950년 12월 ~ 1951년 3월)이 있다. 국민 방위군 사건은 고급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품을 빼돌린 권력형 비리로 인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애꿎은 장정들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이승만 정권, 다시 말해 제1공화국(1948년~1960년)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이승만은 두 번의 '개헌'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발췌개헌(1952년 7월 4일)과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1954년 11월 29일)이 그것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건만, 이승만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대통령은 '간선제(국회의원들이 선출)'였는데, 이승만은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눈치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승만은 강제력을 동원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버린다. 


1954년에는 더 어이없는 개헌을 추진하는데, 바로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이었다. '장기 집권'을 꿈꿨던 것인데, 개헌 내용이 참 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개헌안이 통과하려면 2/3의 찬성(재적인원 203명 중 2/3에 해당하는 135.333명 넘는 136명)을 얻어야 하는데, 그에 한 명 못 미치는 135명의 찬성밖에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승만이 이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해 버린다.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해서 135명이 된다는 괴상한 논리로 자신의 '장기 집권' 플랜을 밀어붙인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그 외에도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죄로 사형을 시켰고, 급기야 1960년에는 자신의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하며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3·15 부정선거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에는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의 내용이 실려 있었다. 3·15 부정선거는 당시 민중들의 마지노선이었던 모양이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4·19 혁명이 벌어졌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필자가 알고 있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이다.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고?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던 시절의 이승만은 그래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지 않냐고? 그럼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1908년, 독립운동가인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 오클랜드에서 친일 미국 언론가 D.W. 스티븐스를 저격해 사살했다. 두 사람은 재판에 회부됐는데, 재판의 진행을 위해 통역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 우리에겐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엘리트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있지 않았던가? 당연히 큰 기대를 갖고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였다. 물론 '기독교인'을 명목으로 내세운 건 거짓말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을 꿈꾸었던 이승만에게 유력한 백인 언론인을 사살한 장인환과 정명운은 부담스러운 짐이었던 것이다. 


1919년 2월,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위임 통치안'을 제출한다. 그 안에는 국제 연맹이 대한민국을 위임 통치해 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의 이승만은 어떻게 했을까? 비판에 직면한 그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결국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고 앞으로의 독립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의가 펼쳐진다. 각기 다른 의견들의 충돌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지만 한 가지 성과는 거뒀다. 바로 이승만의 탄핵인데,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탄액안 심판위원들에 의해 1925년 3월 정식으로 파면된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박용만을 견제하는 등 탐욕을 부리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탓에 독립운동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갔던 이야기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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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필자가 알고 있는 이승만의 이야기가 서세원이 연출할 '건국대통령 이승만'에도 나올까? 물론 영화는 '전기 영화'가 아닌 이상, 특정한 시기, 특정한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보여주기 때문에 꼭 위의 내용들이 영화에 반영되리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서세원을 비롯한 이승만 예찬론자들이 영화 '건국대통령 이승만'에서 위의 내용들을 제외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어떤 이승만을 그려내든 그건 그들의 마음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은 없길 바랄 뿐이다. 관점의 차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예찬'을 갈무리하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기왕 이승만과 관련된 영화가 나온다고 하니, 우리들도 이승만에 대해 미리 예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필자가 알고 있는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일부분이긴 하지만)를 풀어놓았으니, 이번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차례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승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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