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철퇴만이 능사일까? 필승 전략은 오히려 포용이다

너의길을가라 2014. 2. 1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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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보다 자주) 강고(强固)한 '벽'을 실감한다. 여전히 선과 악의 싸움이다. 건곤일척(乾坤一擲 )의 단판승부다. 


포털사이트의 뉴스에 달린 댓글과 각종 게시판과 커뮤니티, SNS에는 '정치'와 관련된 엄천난 양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물론 그 '정치'란 협의의 정치 즉, '정치꾼'들의 정치다. 그 이야기에는 '선과 악의 싸움'만이 존재하며, 비아냥과 욕설 등의 비하로 가득하다. 물론 욕에는 배설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민초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씹으며' 일종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그 긍정적 효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져올 (훨씬 더 큰)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논란이 됐던 '더 지니어스 2'를 보면서, 사람들은 '추악한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가 낫다고 강변한다. 맞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에게 나의 삶 속에서도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명쾌한 대답을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것을 정치의 영역에 대입하면 어떨까? 사람들은 니체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이를 부정한다. '괴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좀더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우리가 '조선일보'와 같은 방식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일베'와 우리는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일보'식(式), '일베'식(式)으로 싸워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런 약해빠진 생각때문에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이런 말장난 같은 논쟁을 지켜보고 있자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순환 논리를 대하는 것만 같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이겨야 품격과 품위도 챙길 수 있다는 쪽과 저들과 같아져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쪽의 이야기는 서로를 납득시키지 못한 채 허공 속의 메아리처럼 맴돌기만 한다. 


이러한 싸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정치가 여전히 '선과 악의 싸움'으로 여겨지고 있고, '협의의 정치'에 매물되어 있으며, '건곤일척의 단판승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친노종북' (혹은 종북좌파)와 '친일매국노'의 격렬한 싸움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양산할 뿐이다. 그 싸움은 '당위'와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들을 피로하게 한다. 처음에는 서로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삿대질'과 '욕설'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삿대질뿐이요, 귀에 들리는 건 욕설뿐이다. 그때부턴 그 놈이 그 놈인 셈이다. 


양 측의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정치라는 것이 실제로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고, '삶의 정치'라는 말이 정치의 속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는 '선거'를 통해 성적을 확인받는다. 따라서 '협의의 정치' 즉, '선거의 승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서부터 시작하면 '닮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순환논리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된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론이 남는다. 어떻게 해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정답은 포용(包容)이다. 우리는 쉽게 '친일파 처단'을 말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흔히 프랑스의 경우,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1000명 넘게 사형시키는 등 '제대로' 숙청했던 것을 예로 들곤 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고작 4년 동안 나치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다. 우리는 무려 36년이나 됐다. 프랑스와 우리의 경우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2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와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36년 동안 변절하지 않았던 사람들,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고 투쟁했던 사람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까지 '처단의 대상'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물론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투사들을 밀고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처단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를 제외한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정말 악질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악질 친일파와 생계형 친일파를 구분하는 것이다. 36년은 정말 엄청나게 긴 기간이다. 한 세대가 넘는다. 당시의 아들 세대는 '조선(혹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하지 못했다. 일제 치하에서 교육을 받고,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일제에 부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써 말이다. 


진정한 의미의 '친일파 처단'이란 악질적인 친일파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 '생계형 친일파'가 자신들의 잘못 혹은 비겁함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올'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일파 처단'만을 외치는 '강박적 태도'로는 이러한 과정이 이뤄질 수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들은 우선 겁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 처단'을 외치는 저들이 너무도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그야말로 '공포'로 다가오지 않을까? 결국 방어논리가 작용할 수밖에 없고, 그들만의 '카르텔'은 공고해질 것이다. 상황은 역전된다. 비겁하지 않은 사람보다 비겁한 사람의 수가 항상 더 많은 것은 인간 세상의 법칙 아니던가.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이러한 '강박적 태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면 과장된 말일까? 소위 '일베충'이라고 지탄받는 연예인들을 생각해보자. 시크릿의 전효성을 비롯해서 크레용팝과 최근에 '아빠 어디가 2'에 합류한 김진표에 이어진 '테러'들은 그 당위와 옳고 그림을 떠나서 매우 폭력적이었다. 물론 이들이 과거에 일베의 회원으로 활동했을 수도 있고, '눈팅'만 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 어저면 몰래 열심히 활동 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반성'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 이들의 기사에 달린 댓글은 90% 이상이 욕설과 비아냥이다. 선과 악의 싸움, 피아의 구별,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전투적 사고가 깊은 골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반성의 여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하다. 용서의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그들만의 카르텔은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두렵기 때문이다. 정의의 철퇴는 아무리 정의의 이름으로 가하더라도 '철퇴'일 뿐이다. 철퇴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지난 날의 친일파 처단은 오늘의 '일베충 처단'과 매우 흡사하다. 여유가 없는 우리들은 무작정 철퇴를 휘두르기에 급급하다. 상대방이 싸울 의지가 있는지, 항복할 의사는 없는지, 지금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그런 것을 파악할 시야가 전혀 확보되어 있지 않다. 그런 식으로 철퇴만 휘두르다간 결국 지치고 만다. 혹은 스텝이 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친일파든 일베충이든, 새누리당 출신이든 간에 그들에게 우리가 내밀어야 할 것은 철퇴가 들려있지 않은 맨손이다. 언제든지 손을 맞잡을 준비를 하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같이 할 생각이 없냐고.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함께 하길 바란다고.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만약 우리에게 진정으로 '정의'가 있다면, 우리가 진짜 정의에 속한다면, 그 정도의 자신감이 있다면, 지금처럼 괴물이 되어가면서까지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토록 염원하는 정권교체, 그 선거에서 이기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은 철퇴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선이고 너희는 악이라는 태도, 한번 잘못하면 무조건 철퇴로 내려친다는 무시무시한 태도로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여유를 갖고 손을 내밀자. 이상적이라고? 나이브하다고? 아니, 이것이야말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진짜 필승 전략이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 결코 건곤일척의 한판 싸움, 즉 단기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나그네 옷 벗기기 내기의 승자가 바람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것과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음으로써 마음의 감화(感化)를 일으켰던 고사(故事)의 가르침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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