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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 이전에 '조용한 희망', 마가렛 퀄리의 진가가 빛난다

너의길을가라 2025. 5. 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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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컵이 벽을 향해 날아가 부딪친다. 깨진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알렉스(마가렛 퀄리)는 자신을 겨냥한 폭력성에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도망쳐야 한다. 알렉스는 남편 숀(닉 로빈슨)의 학대를 피해 두 살배기 딸 매디를 데리고 황급히 집을 벗어난다. 지갑에는 고작 18달러뿐이다.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자 12달러가 남는다. 당장 딸과 머물 집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이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우선, 가정폭력 피해자 임시 숙소에서 한숨 돌리지만,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짓는 일부터 버겁다. 저들과 나는 다르지 않나. '숀은 나를 때리지는 않았는데..' 직접적인 폭력을 당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케이스는 가정폭력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정신적 학대(폭력)도 엄연히 가정폭력에 해당한다는 걸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알렉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새출발을 위해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자 하지만, 수많은 조건들로 가득한 행정 절차 앞에 맥이 풀린다. 고정적인 수입의 직장이 없으면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다. 알렉스는 딸 메디를 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 폴라(앤디 맥도웰)에게 맡기고 가사도우미로 나선다. 하지만 세상은 알렉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청소를 하러 간 부잣집에서 돈을 떼이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차를 잃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엄마가 돌연 손녀 돌보기에 싫증을 내 숀에게 메디를 보내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결국 숀이 양육권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지난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처럼 알렉스는 냉혹한 현실 속에 처하게 되지만, 낙담할 수많은 이유 속에서도 '조용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물론 그가 가정폭력 '생존자'로 살아남기까지 알렉스를 놓지 않았던 '연대'의 손길이 존재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스테파니 랜드의 자전적 에세이 'Maid'(가사도우미)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10부작 오리지널 '조용한 희망'은 싱글맘 알렉스가 홀로 고군분투하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우 공유가 시즌2가 없어서 아쉬워 했을 정도로 이야기의 힘이 강렬하고 몰입감이 뛰어나다. 영화 '서브스턴스'로 잠재력을 폭발시킨 마가렛 퀄리의 연기력이 단연 인상적이다.

'조용한 희망'은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선, 빈곤과 불안정한 주거의 상관관계를 조명하고, 가난의 대물림을 날카롭게 다룬다. 알렉스는 딸과 함께 머물 집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저임금 노동자에게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결국 알렉스는 숀(이 제공하는 주거 공간)에게 되돌아가고 마는데, 이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굴레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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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절망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연대의 손길이 알렉스가 절망에 빠지는 순간마다 찾아온다. 쉼터의 대니엘은 딸의 양육권을 잃고 무기력에 빠져 카펫에 누워 있는 알렉스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서 뭐라도 해."라고 외치며 일으켜 세운다. 쉼터 관리인 데니스는 알렉스의 상처난 마음을 포근하게 보듬는다. 레지나는 절망에 빠진 알렉스의 꿈에 다시 불씨를 지펴준다.

한편, 등장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야말로 '조용한 희망'의 또 다른 미덕이다. 엄마 폴라는 시종일관 알렉스의 숨을 막히게 만드는데, 그 또한 가정폭력 생존자였음을 밝히는 대목에서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가정폭력 가해자로 등장하는 숀 역시 어렸을 때 가정폭력의 피해를 입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이처럼 '조용한 희망'은 가정폭력의 굴레가 얼마나 뿌리깊은지 강변한다.

시청자들은 '과연 알렉스의 인생이 나아지긴 하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그의 삶을 따라가게 된다.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불운과 불행, 난관 앞에 시청자마저 미칠 지경이지만, 알렉스를 앞으로 이끄는 힘은 결국 딸에 대한 사랑이며, 가정폭력 현장에서 자신을 구출했던 엄마의 사랑이다. 알렉스가 인생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이다.  

'조용한 희망'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23년 가정폭력 발생건수는 4만 4524건으로 가정폭력 피해자는 4만 3518명이다. 이 중 73.2%가 여성이다. 신고되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 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피해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 참다못해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한다.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들은 제대로 지원받고 있을까. 당장의 폭력에 대한 보호를 넘어 생존과 자립을 위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지원 말이다. 쉼터 관리인 데니스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4번의 탈출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며, 자신은 7번이나 걸렸다고 털어놓는다. 오늘도 수많은 알렉스들이 가정폭력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용한 희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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