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이 지난 후, 청명함이 찾아온다

너의길을가라 2016. 8. 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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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뒤의 풍경은 왜 아름다운 건지 계속 궁금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떤 영화들은 관객을 수다스럽게 만든다. 자꾸만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든다. 주인공에 대해서, 혹은 영화의 여러가지 부분들에 대해서, 어쩌면 반전에 대해서. 한편, 어떤 영화들은 관객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마치 태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남은 고요한 '청명(淸明)함'처럼.  <태풍이 지나가고> 같은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말을 잃게 만든다. 끊임없이 '침잠'하게 만든다.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지만,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몇 마디를 지어내본다. 



"모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 첫머리에 쓴 구절이라고 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 즉 감독이 관객에게 건네고 싶었던 진심 어린 위로라고 볼 수 있다. "네 꿈을 향해서 달려가야지!"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건 쉽지 않은 거야.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게 중요한 거야"라며 다독인다. 이렇듯 <태풍이 지내가고>는 '영화'라는 매체가 누군가에게 깊은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현대인들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도망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계속해서 쫓기고 있는 듯한 인생, 불안하고 초조한 삶, 안주할 틈 없이 끊임없이 '도망'해야만 하는 존재 말이다. 실제로 무엇에 쫓기고 있는 알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발걸음을 떼기 바쁘다. 무엇일까, 우리를 쫓고 있는 그 무엇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리를 도망가게 만드는 그 무엇은, 지금의 나를 향해 "원했던 어른이 됐어?"라고 끊임없이 다그치는 어린 시절의 내가 던지는 질문은 아닐까?




료타(아베 히로시)는 15년 전 문학상을 수상한 촉망받는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사설탐정 사무소에서 일하며 근근이 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번 돈마저도 경륜장에서 도박으로 날려버린다. 어찌 보면 한심한 어른이라 할 수 있다. 좀더 예쁜 말로 포장하자면 '철부지' 어른쯤 될까? 이혼한 아내 교코(마키 요코)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기색을 보이자 그 일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아들 싱고(요시자와 다이요)와는 한 달에 한 번 만나지만, 양육비조차 제대로 줄 수 없는 처지다. 


후회와 미련, 그리움이 료타의 인생에 가득하다. 지금 료타의 모습은 분명 어린 시절 료타가 꿈꿨던 미래는 아니다. 훨씬 더 그럴듯한 삶을 그렸고,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 의뢰인의 푸념처럼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거지?"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을 뒤흔든다. 하지만 여전히 료타는 어머니 요시코(키키 키린)의 연립주택을 들락날락하며 아버지의 유품 중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몰래 가져나와 전당포에 맡기는 찌질한 어른일 뿐이다.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거란다." (요시코)


인물들의 변변찮은 일상을 그려 나가던 영화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밤(일종의 갈등과 절정인 셈인데, 이조차도 과장되지 않게 표현해냈다)을 맞이한다. 태풍 때문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진 료타와 그의 아내 교코, 그리고 아들 싱고는 요시코의 연립주택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과연 이들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태풍이 불어닥친 밤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현실은 녹록치 않고, 조건들은 여전히 열악하다. 료코는 단호하다. 아들의 결혼생활이 다시 회복되길 바라지만, 교코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는 요시코의 태도는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또, 료타와 싱고가 미끄럼틀 안에서 나누는 대화와 뒤이어 미끄럼틀로 찾아온 교코가 료타에게 '이별'을 말하는 장면들은 조곤조곤 눈시울을 적신다.



뭔가 뻥 뚫리는 것 같아서 태풍이 좋다고 말하는 요시코처럼, 누군가에게 '태풍'은 해소(解消)의 역할을 한다. 어떤 이에게는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리는 태풍은 상실과 아픔이 되기도 할 테고, 또 누군가에겐 바닥을 딛고 일어설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당신에게 태풍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료타에겐 무언가를 '깨닫고 성장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과거라는 후회와 미련에 묶여 있는 나 자신을 풀어 '현재'를 살도록 하는 것. 모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불행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물론 그 대답을 수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관객의 몫일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를 통해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보길 바란다. 분명,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의 청명함이 당신을 찾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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