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윤진숙 전 장관을 대하는 우리들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

너의길을가라 2014. 2. 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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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타인을 비방하는 사이에도 다음에는 자기가 가해자나 그 친척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 생각하지 않는 걸까?


미나토 가나에, 『야행관람차』-


글을 쓰면서 가급적 지키고자 하는 원칙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정 개인에 대한 비판(혹은 비난)의 글은 지양(止揚)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실수나 잘못에 지나칠 정도로 매정하다. 저지른 과()에 비해 과도한 비난을 가하고, 과중한 책임을 요구하는 편이다. 우리도 언제든지 그러한 실수와 잘못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다를 것이라고 100%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개인은 연약하고 무력하다.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대상은 언제나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고 '시스템'이어야 한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또, 개인에 대한 비판이 조심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감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을 타깃으로 삼아 그를 둘러싸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바로 그 대상이 공직자인 경우다. 공직자는 대중의 비판에 노출되어야 하고,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수용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윤 전 장관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개인적 원칙에서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원칙으로부터 파생되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신상(身上), 가령 그의 외모라든지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것을 비판의 소재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이틀 동안 윤진숙 전 장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두 편 썼다. 그 글에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윤 전 장관의 자질과 사과의 방식과 태도, 그리고 인사청문회를 무시했던 인사권자(대통령)의 무리한 임명 강행 등이었다.

비록 글은 많이 팔렸지만, 그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댓글의 대부분이 외모에 대한 비난과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낯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너무 심한 욕이 담긴 댓글들은 제외하고, 그나마 읽을 만한(?) 것들만 발췌해봤다. 


이 정도 가지고 왜 호들갑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외모에 대한 언급과 여성에 대한 비하는 이유 여하와 그 정도를 막론하고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자체 심의로 욕설이 들어간 것은 걸러낸 것이 저 정도다) 성별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로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틀에 갇혀 누군가를 외모로 손가락질하고 희희낙락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외모에 대한 언급과 여성에 대한 비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어째서 이토록 쉽게 허용되는 것일까? 



필자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던 것은 바로 위의 댓글이었다. 윤진숙 전 장관에 대한 비난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면서 그것이 혹 '모난돌에 대한 린치는 아니었을까'라는 반성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었다. 물론 '모난 돌 밥줄 끊기, 불이익 주기, 둥근 돌들의 모난 돌 집단 따돌림'이라는 지적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모난 돌'에도 종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한 가지 마음이 걸렸던 것은 윤 전 장관의 다듬어지지 않았던 자연인으로서의 모습들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부분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윤진숙 전 장관은 정치적 경험이 전무(全無)하다. 20여년을 해양수산 분야의 연구원으로 지내왔던 사람이었던 만큼 그의 행동은 계산된 것이라기보다는 소탈한 그 본연의 것이었다. 청문회에서 자주 웃음을 터뜨렸던 것은 청문회를 우습게 여겼다거나 국민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쑥쓰럽거나 뻘쭘할 때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대처법은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한 것이다.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에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도 사실 고도로 훈련된 정치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위의 댓글을 보면서, 문득 유시민 전 장관이 처음 국회에 입장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는 국회의원은 정장을 입고 국회에 출석해야 한다는 기존의 틀, 이상한 규칙에 과감히 도전했다. 백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를 두고, 국회를 모독했다는 날 선 비난이 엄청난게 쏟아졌다. 훗날 유시민 전 장관은 그 날의 일을 후회하듯 회고했지만, 필자는 국회 내에 만연해 있는 엄숙주의에 도전했던 깜찍한 시도에 박수를 보냈다. 그야말로 '모난 돌'의 출현 아니겠는가? 물론 '모난 돌'의 운명은 가혹했다. '둥근 돌'들의 집단 린치가 어김없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유 전 장관과 윤 전 장관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유 전 장관의 행동은 의도된 것이었고, 자질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다. 반면, 윤 전 장관이 청문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분명 '자질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청문회를 준비할 기간이 충분히 주어졌음에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연발했던 것은 분명 준비 부족을 넘어 자질 부족이었다.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에서도 국민들과 동떨어진 상황 인식과 안일한 대처로 일관했다. 다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과 중간중간 터뜨렸던 웃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밀었던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든다. 고상하신 국회의원들께서는 불쾌하셨을지라도 우리는 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도 '장관'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윤 전 장관은 결국 경질됐다. 그는 자진 사퇴할 기회마저 빼았긴 채 쓸쓸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1차적인 책임은 역시 인사권자에게 있다. 청문회를 무시한 채, 임명을 강행하면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자질 논란'에 휩싸일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참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윤 전 장관에 대한 비판이 그의 업무처리와 같은 '자질'에 대한 것이 아닌 외모나 성에 대한 비하로 점철되고 있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일베를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잣대는 엄격하고 공평해야 한다. 그들을 비판하는 잣대가 우리에게는 가벼이 적용되어선 안 될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특정인(그것이 공직자이기를 바란다)을 비판하게 될 것이다. 비판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비판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내용이 외모나 여성에 대한 비하와 같은 저질스러운 것이 아니라 알찬 것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또, '모난 돌'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조금 다른, 조금 독특한 사람들도 편히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누군가를 바꾸려 하기보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 이번 일을 통해 정부도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하겠지만, 우리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조금 깊게 고민해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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