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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하고 따뜻했던 박보검의 엔딩, '남자친구'에 깊이 빠졌다

너의길을가라 2018. 12. 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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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선택했다. "대표님! 차수현 대표님!" 소리내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공간에는 균열이 생긴다. 회사라는 공적인 장소가 주는 위계(位階)가 사라진다. 어쩌면 시간도 멈춘 듯하다. 남자의 목소리가 여자에게 가닿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들린 예상할 수 없던 목소리. 여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여자는 말없이 응시한다. 


여자는 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곧 '지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미 발이 깊이 빠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그냥 당신 인생을 살아요.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말아요.' 여자는 만류한다. 그러나 남자는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다. '난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혼자 서 있는 세상으로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눈빛은 단호하고, 거침없다. 알 수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저 돈 좀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저랑 라면 먹으러 가시죠. 휴게소는 차 막히니까 오늘은 저랑 편의점에서 컵라면 드시죠."




위계가 사라진 공간에는 대표와 신입사원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만 남는다. 그곳에는 스캔들을 만들어 차수현을 추궁하던 최진철 이사(박성근)의 음모도 사라지고, 수많은 회사 직원들의 수군거림도 자취를 감춘다. 저 투명하고 순수한 언어 앞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 저 해맑은 얼굴 앞에 세상의 시선으로 쓰인 추문(醜聞)은 지워지고 만다. 


남자의 감정은 확실하지 않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장난 같은 호기심'은 결코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들여놓는다는 거, 아주 잠깐이더라도 그런 건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나의 이 감정이 뭐냐고 묻지 마세요. 아직은 나도 모릅니다.'라고 유보하면서도 '지금의 나는 당신을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것, 그것입니다.'라고 분명히 정의한다. 


여자는 그런 남자가 고맙다. 겁없이 달려와 기꺼이 자신의 옆에 서겠다고 말하는 남자의 순수한 마음이 생경하면서도 예쁘다. 자신을 위해 이 지옥에 발을 들여놓겠다는 남자의 용감한 마음이 낯설면서도 반갑기만 하다. 고맙고 미안하다. 여자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동시에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남자가 선물했던 시집(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속에서 여자가 읽었던 시를 떠올리게 된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 바로 너다. - 나태주, '그리움' -


<남자친구> 4회 시청률은 9.264%를 기록했다. 


tvN <남자친구> 4회의 엔딩은 용감했고, 따뜻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궁지에 몰린 차수현(송혜교)을 위해 과감히 뛰어든 김진혁(박보검)의 방식은 생소했다. 잡티 없는 순수함, 의도 없는 명쾌함이었다. 음모와 스캔들, 그 추잡한 것들의 악취를 말끔히 씻어내는 진심이었다. 어찌보면 무모하고 엉뚱한 진혁은 마치 '돈키호테'와 닮아 있었다. 


수현은 새장 속에 갇힌 새 같았다.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는 듯 했지만, 실상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수현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유력한 정치인인 아빠 차종현(문성근)의 그늘은 깊었다. 또,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야망에 사로잡힌 엄마 진미옥(남기애)는 딸을 태경그룹에 시집보내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종현은 그런 엄마의 학대를 묵인한다. 수현은 말없이 아빠(의 정치)를 돕는다. 


태경그룹의 회장 김화진(차화연)은 전 며느리인 수현을 옭아매려 한다. 겨우 이혼을 하고 도망쳐 나왔지만, 석모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수현을 부르고, 드레스 코드까지 지정해 의상을 보낸다. 또, 이혼 서류의 3조 4항(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모든 권리를 잃게 된다)을 들먹이며 수현을 압박하고 제어하려 든다. 급기야 엄마와 전 시어머니는 수현의 의사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재결합을 결정한다. 수현에겐 숨 쉴 틈이 없다.  



"난 어릴 때 친구가 없었어요. 같이 놀고 싶었는데, 그런 걸 엄마가 좋아하지 않았어요. 맘껏 친해지면 다시 멀어져야 했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원래부터 다 별로야, 그렇게 생각하는 법을 익혔어요. 좋아진 친구랑 하루아침에 멀어지는 건 아주 괴로운 일이거든요. 잠시 잊었어요. 하루를, 일상을 함께 했을 때 신났는데, 다시 멀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는 건, 여전히 괴로운 일인데.. 그래서 그만하려는 거예요."


그런 수현에게 쿠바에서 만난 진혁은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 같은 존재였다. 일상을 벗어난 낯선 그 곳에서 난생 처음 자유를 만끽했다. 맨발로 쿠바의 야경을 거닐고, 진혁이 선물한 신발을 신고 쿠바의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진혁은 휴식 같은 존재였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떠올리게 해줬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웃음을 되찾게 해줬다. 그것이야말로 수현에게 진짜 꿈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쯤되니 <남자친구>가 왜 그리 깝깝한 상황들을 설정해 뒀는지 알 것 같다. 아침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진부한 설정과 캐릭터를 애써 강조했는지 이해가 된다. 4회의 엔딩은 드라마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 놓았다. 부디 '돈키호테' 같은 진혁의 담대함이 수현에게 좀더 큰 용기를 주길 기대한다. 설령 수현이 지금의 권리를 잃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권리를 찾는다면 그건 결코 '불상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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