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선언 이후의 씁쓸한 풍경

너의길을가라 2015. 10. 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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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발행제체 개선방안은 역사적 사실 오류를 바로잡고 이념적 편향성으로 인한 사회적 논쟁을 종식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민통합을 이룩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역사교과서가 검정제 도입 이후 국민을 통합하고, 헌법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인식을 기르는데 기여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이념논쟁과 편향성 논란을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교과서 집필진이 다양한 관점을 가진 인사로 구성되어 있지 못하며, 그 결과 검정제의 가장 큰 취지인 '다양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각종 사실 오류와 편향성을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한 교과서를 학교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짐작하지 못했을까? '국민 통합'을 거듭 강조했던 박근혜 정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국민 분열'을 조장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12일, 정부가 기어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올바른 교과서')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국민들은 정확히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찬성과 반대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은 너무 심화되고 있다.


교육부의 발표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 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역사 교육은 결코, 정쟁이나 이념 대립에 의해서 국민을 가르고 학생들을 나눠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정작 국민을 가르고 학생들을 나누는 것이 누구인지 반문(反問)하고 싶다. 지금부터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선언 이후의 씁쓸한 풍경들을 차분히 되짚어보도록 하자.


1. 역사학계와 중ㆍ고교 역사교사들의 반발


서울대 역사 관련 학과 교수 34명

연세대 인문ㆍ사회분야 교수 132명 

고려대 역사ㆍ인문사회계열 교수 160명

연세대 사학과 교수 13명

경희대 사학과 교수 9명

서울시립대성균관대중앙대한국외대 등 4개 대학 사학과 교수 29명

이화여대 교수 74명

서울여대 교수 62명

동국대 역사교육과와 사학과 교수 8명

전남대 역사교육과와 사학과 교수 19명


"제의가 오리라 생각지도 않지만, 향후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부끄러운 처신을 절대 하지 않겠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 13명)



우선, 돋보이는 것은 대학 교수들의 잇딴 반대 성명이었다. 13일 연세대에서 시작(정부의 발표가 있기 전인 2일 서울대 교수들의 성명이 있긴 했지만, 정부 발표를 기점으로 본다면)된 불길은 고려대, 경희대(14일)로 이어졌고, 15일에는 동국대ㆍ 부산대ㆍ서울시립대ㆍ 성균관대ㆍ 이화여대ㆍ 전남대ㆍ 중앙대ㆍ 한국외대 등 전국적인 들불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또, 중·고교 역사교사들도 국정 교과서 집필 거부에 가세했다. 이들은 국정교과서 제작 참여를 거부하는 서명을 진행하고 있다. 46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관계자는 "다음주 초 교사들이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라 밝히기도 했다. 한편,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게시판에는 국정 교과서에 찬성한 교총의 결정을 두고, 교사들의 회원 탈퇴 글이 잇따라 게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2. 두 쪽으로 갈린 대한민국, 확산되는 시위



원로교육자(퇴임교사와 명예교수)들의 기자회견, 이화여대 총학생회 소속 학생들의 기자회견,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 10여 명의 서명 운동, 심상정 대표 등 정의당 의원들의 1인 시위..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정치권 안팎을 가리지 않고 점점 커지고 있다. 이뿐인가? 청소년으로 이뤄진 '국정교과서 반대 청소년 행동'도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은 죽었다"고 외치고 나섰다. 17일(토요일) 오후 4시에는 '국정교과서 반대 범국민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물론 국정 교과서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종북좌익척결단,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바른사랑어머니연합을 비롯한 보수(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스럽지만) 단체들은 "가뜩이나 국민들이 분열돼 하나의 역사를 두고 너무 다른 평가를 내놓는 게 문제이다. 국정화는 국민들을 하나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할 것"이라며 국정화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은 새정치민주엽합 의원들의 거리 서명을 저지하기도 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국정 교과서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은 47.6%, 반대 의견은 44.7%로 나타났다. 오차 범위 내의 차이인 만큼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백중세(伯仲勢), 두 쪽이 났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이념별, 지역별, 연령별로 극명하게 나뉜 여론은 이 싸움이 쉬이 봉합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있다. 


3. 막장으로 치닫는 싸움, 본질은 어디로 갔는가



15일에 열렸던 경기도의회에서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포착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촉구 건의안에 대한 심의를 단독으로 처리하자, 남경순 의원을 비롯한 새누리당 소속 여성 의원들이 의장 단상을 지키기 위해 의장석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 과정에서 10여 분 정도 몸싸움이 일어났고, 남경순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에 의해 안겨(!) 옮겨졌다. 


이에 대해 남경순 의원은 "나를 밀치기 위해 여성인 나를 뒤에서 밀치고 끌어안아 셔츠 단추가 떨어졌다. 나를 저지한 야당 의원이 누구인지 사진을 확인해 성추행으로 고소하겠다"며 격분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남 의원을 뒤에서 안고 있는 의원의 표정이 (단정지을 순 없지만)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은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연 발언 → "박정희 그 때 (김창룡이) 죽여 버렸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죠. 우리 언니는 태어나기도 전이에요.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살려 줬습니다. 오늘의 박근혜를 있게 한, 오늘의 박근혜가 있기까지는 뭐 이런 분들의 다 은덕이 있는 거죠"


 보수 언론의 활용 → "김창룡이 박정희를 죽였어야했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1년 전 강의(2014년 11월 28일 문화다양성 포럼 초청강연) 때문에 홍역을 치러야 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 교수의 강의 동영상이 상영되면서 논란이 커진 것인데, <TV조선>은 짜깁기를 통해 강연의 주인공인 한 교수를 비난하고 나섰다. 보수 언론들도 이에 가세해 한 교수를 난타(亂打) 했다. 

 

한 교수는 입장문을 발표하며 "당시 남로당이 한국군부에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였던 박정희가 1948년 여순반란 사건 이후 전개된 숙군 사업에서 체포되어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여순반란 사건 관련자들이 수십명 씩 무더기로 총살당하던 시절에 숙군 책임자 김창룡이 박정희의 호소를 받아들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켰을 뿐이다. 이 이야기가 왜 박정희를 죽였어야 한다로 들리는지 모르겠다"며 반박하고 나섰다. 



이쯤되면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진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논란'이다. 한 교수가 "1년 전에 한 강연이 새삼 모든 역사학자들이 반대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호도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개탄을 금치 못한 것처럼, 이미 한 교수는 적절히 활용된 셈이다. '진흙탕 싸움'은 시작됐고, 그 안에서 소비될 '말'들이 강제 소환되고 있는 양상이다. 


앞으로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마치 블랙홀과 같은 싸움이 계속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것일까? 미국 윌리엄 패터슨대의 아시아사연구 책임자인 디어도어 쿡 역사학과 교수는 "단 하나의 역사적 관점을 추구하겠다는 이번 시도 하나만으로도, 지난 세기에 힘겹게 구축해온 '진실의 추구자'로서의 한국의 이미지는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비판들에 귀를 막고 있다. 본질인 '역사'는 온데간데 없고, 남은 것은 '이해관계'뿐이다. 아니, 애초부터 '본질'은 없었던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를 위해, 여당인 새누리당은 총선 승리를 위해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일부 세력)도 선거 국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이 진흙탕 싸움에 기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피해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뒤집어 쓰게 됐다. 자라나는 아이들,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아이들이 최악의 피해자가 되는 일만 남았다. 양분(兩分)된 국민들, 혼란스러운 교육 현장,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낼 진흙탕 싸움.. 이 씁쓸한 풍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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