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대립군>을 위한 변명, 진짜 노무현이 나타났다!

너의길을가라 2017. 6. 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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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에 '흥행'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1차(원)적인 지표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니, '상업 영화'로서 얼마나 많은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 모았는지는 가장 결정적인 성적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대립군>은 '완전히' 실패했다. 현재(6월 7일)까지 누적 관객 수 74만 6,787명.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총 제작비가 110억 원을 넘는 대규모 영화가 얻은 성적이라기엔 너무 처참하다. 이대로라면 순익분기점인 '330만'까지는 까마득해도 너무 까마득하다.


혹시 '역주행'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같은 날(5월 31일) 개봉했던 <원더우먼>이 158만 7,731명을 동원하며 2배 이상 앞서 가고 있고, 한 주 앞서 개봉했던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도 271만 2,467명을 기록하며 <대립군>의 위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톰 크루즈를 앞세운 <미이라>의 공습은 결정타라 할 만 하다. <미이라>는 개봉 이틀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에서 불어닥친 태풍들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밀린 건 치명적이다. <대립군>에 앞선 5월 25일 개봉했던 <노무현입니다>는 140만 5,529명의 눈시울을 적시며 기적의 역주행을 이뤄내고 있다. 이쯤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립군>의 정윤철 감독은 자신의 SNS에 "승자독식, 1등만 살아남는 사회는 정글이지 사람 사는 곳이 아닙니다.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관객의 권리는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라며 스크린 독점을 성토하는 글을 게시했지만, 그다지 공감을 얻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위한 '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듦새에 상투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누가 왕을 일깨우고, 나라를 세우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대립군>은 분명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가 분명하다. 제목 그대로 <대립군>은 '대립군(代立軍)'에 대한 이야기다. 생존을 위해 남의 군역(軍役,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정남들에게 주어진 의무), 요즘으로 말하면 '국방의 의무'를 대신 치르던 대립군 말이다. 물론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다. 처음에는 '편법'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일부가 저지르던 '편법'이 차츰 성행하게 되고, 어느덧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단계에 이른다.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째서 '대립'이 통용되게 됐냐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왜 이런 불법을 묵인했던가. 착취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요역(徭役)'이었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대가 없이'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수취체제의 하나였던 요역은 농사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농민들은 당연히 이를 기피하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부족할 때, 가장 용이하게 '끌어' 쓸 수 있는 노동력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군대다. 국가는 자연스레 농민 대신에 군인을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했다. 누군들 상관이 있었겠는가. 일만 시키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군인도 차츰 요역 동원을 꺼리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사서 대역을 시키는 '대립'이 성행하게 된다. 누군들 상관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 불법을 묵인했다. 15세기 내내 평화가 지속됐던 것도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한 장정의 한 달의 대가가 면포로 3필이니, 1년의 대가는 거의 30여 필이나 됩니다. 대립을 하고서도 대가를 받지 못한 자는 증명서를 받아 가지고 가서 독촉하게 됩니다. 독촉을 받은 사람은 전토를 팔고 혹은 우마를 팔게 돼 몰락하게 됩니다. 직접 군에 가면 비용이 훨씬 줄어들 텐데 우선 한때의 편한 것만 생각하고 후일의 폐해를 염두하지 않고 대립을 시키는 것이 풍속이 됐는데 그 폐단을 금하기가 어렵습니다."


- <세종실록> -


군역과 요역의 혹독함을 외면한 채 '한때의 편한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백성이라 탓하는 저 기득권의 사고방식을 보라. 불법적인 군역 면제는 더욱 성행하게 되고, 포를 받고 군역을 면재해 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의 폐단이 발생하자 정부는 더 이상 배겨내지 못하고 아예 이를 합법적인 틀 안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바로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의 실시(중종 36년, 1541년)다. 관청의 군포 요구가 늘어나면서 기피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갈수록 군대는 부실해지고, 임진왜란(1592년)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군사가 부족한 실정에 이른다.



한편, <대립군>은 '대립군(代立君)'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지자 저 혼자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를 향해 떠난 임금 선조를 대신해서 임시 조정이라 할 수 있는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세자 광해군 말이다.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의 군역을 대신 살았던 대립군(代立軍)들과 마찬가지로 광해군도 도망간 임금을 대신해 백성들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왜군을 교란하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 군량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공을 세웠다.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의 광해군을 '각성 이전'의 모습으로 그려 나간다. 궁궐에서 나고 자란 왕자는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전쟁통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가마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궁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생활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장면들이 바껴가는 촉매제는 대립군(代立軍) 토우의 자극이다. 산골짜기에서 가마를 밀어 떨어뜨리는 장면은 광해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광해군은 점차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기 시작한다. 


또, 전쟁의 포화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마주하고 내면의 성장을 이뤄간다. 그 과정이 단기간에 속성으로 진행된다. 그만큼 '전쟁'이라는 건 극적인 상황이니 말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 춤을 추는 장면은 제법 감동적이기도 하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혹자들은 광해군과 대립군, 그리고 백성들 간의 '화해'가 지나치게 쉽게 그리고 뭉툭하게 그려졌다고 말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무능한 왕의 목을 베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조선 왕조를 받아들였던 그 당시 백성들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



또, 왕에 대한 분노를 사그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광해군이 못내 밉기도 하다. 일찌감치 무너졌어야 할 조선 왕조가 지속돼 변화의 시류를 타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으로 당시를 재단하는 건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결국 백성들의 선택은 (광해군과 함께) '조선'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고, 그건 오로지 자신의 터전과 삶, 그리고 가족들을 위한 선택이었지 '선조'를 위한 싸움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할 밖에. 그리하여 <대립군>에서 강조하는 '교룡기'는 매우 큰 울림을 준다. 


이처럼 대립군은 대립군(代立軍)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 대립군(代立君)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나' 스스로를 위해 싸우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대립군'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윤철 감독은 '더 이상 다른 누군가로 살지 말고, '나'의 존재를 자각한 상태에서 싸워나가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대립군>을 보면서 얼마 전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연상일 것이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놓인 나라를 구하는 건 언제나 '민중'이 아니었던가.


한편, 광해군 역을 맡은 여진구는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충실히 연기해 냈다. 또, 토우 역의 이정재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웠고, 곡수를 연기한 김무열의 연기도 단연 돋보인다. 이쯤에서 이상한(?) 변명을 하나 더 해보자. <대립군>이 흥행을 하지 못했던 '외부적인' 요인 말이다. 광해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역사 속 인물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우리는 이미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통해 그 향수를 충분히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진짜 노무현이 영화로 등장한 게 아닌가. <노무현입니다>라고 하는 '진퉁'이 영화관에서 상영 되고 있는데, 굳이 그를 빗댄 혹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대립군>을 선택할 리가 있겠냐는 말이다.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위로를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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