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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가 멈춰섰고, 유리창은 깨졌다.

너의길을가라 2018. 11. 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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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도 아닌데 역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평소처럼 서울역에 들어섰고, 열차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KFC(를 매번 들리는 건 아니다)에 들어갔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역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리 둔감했는지 모르겠다. 역이 한산해야 할 시간대이었는데 말이다. 마침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온 터라, '퀸 공연장에 갔다 왔다보다'라는 시덥잖은 농담이나 떠올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전광판을 올려다 봤을 때에야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이상했다. 전광판의 오류인가? 아니었다. 열차 지연! 그것도 엄청난 지연이었다. 22:00차를 타야 할 시간에 20:30 열차도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지나가던 코레일 직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여쭤봤더니, 선로에 전기 공급이 끊겨서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는 게 아닌가. 두둥! 이 일을 어떡한단 말인가. 급히 인터넷을 뒤져봤다. 내용인즉 17시 무렵 충북 청주시 KTX오송역 상·하행선 구간 전차선로에 전기 공급이 끊어져 근처에 있던 상행선 열차가 멈춰섰다고 한다. 난감한 일이다. 선로에 열차가 멈춰서 있으니, 뒤에 있던 열차들은 당연히 꼼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부 운행이 재개되긴 했으나 새벽 무렵에나 정상화된다는 내용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미련을 일찌감치 버리고 지하철로 노선을 변경해야 하나, 아예 고속버스터미널로 가 버스를 타야 하나, 일단 좀더 기다려 봐야 하나.. 수많은 생각들이 그 짧은 시간동안 스쳐갔다. 서울역 내를 방황하며 한 바퀴 걸으면서 멘붕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마땅한 답이 없었다. 


저들의 멘붕이 전염되려던 찰나 전광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1:35 열차(하행선)가 운행이 될 거라는 소식이었다. 전광판이 움직이니 사람들도 움직인다. 이럴 때 내가 끊은 열차가 21:35에 출발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멀뚱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비상 상태에는 먼저 승차하는 게 상책이다. 내 기차가 출발해야 할 시간(22:00)은 이미 지났다!

승무원에게 목적지를 확인하고, 기차에 올라타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한편, 인터넷 포털에는 ‘탈출 흔적’이라는 간단한 제목의 기사가 랭킹 상위권에 덩그러니 배치돼 있었다. 읽지 않아도 왠지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았다. 다름 아니라 열차 안에서 3시간 가까이 방치(라고 해도 무방하리라)돼야만 했던 승객이 유리창을 깨버린 것이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방송에는 ‘괜찮다. 곧 정상화 될 것이다. 죄송하다’는 코멘트가 계속 흘러나왔을 것이다. 승무원들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거라 미뤄 짐작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승객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기다릴 수 없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그리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댓글 속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타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잘했다고 보듬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의 허망함을 숱하게 경험했던 우리가 아닌가. 어째됐든 기차는 다시 달리고 있다. 다시 멈춰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선로에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래도 기차는 다시 달리고 있다. 완전한 정상화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다. 코레일의 후속 조치(환불이든, 할인 쿠폰이든)가 뒤따르겠고, 코레일의 조치에 대한 비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큰 소동의 근처에 머물렀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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