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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이 담은 이순재, 이 시대의 선배이자 어른이었다

너의길을가라 2019. 1. 11.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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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드는 건 근사한 일이지만, 늙는 건 두렵기만 하다. '오래 살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적당한 나이에 생을 마감하면 좋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삶이란 불가항력이다. 흔히 '100세 시대'라 한다. 2009년 국제연합(UN)은 '세계인구고령화'라는 보고서에서 앞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100세 장수(長壽)의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천명했고, 그 흐름은 점차 가속화 됐다.


희망찬 언어였을까. 혹자들은 '행복한 노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100세 시대'라는 말은 '공포'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과연 나의 100세는 어떤 모습일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막막하다. 최소한 건강할 거라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다고 해도 막상 답이 나오지 않는다. 분명 사회 생활은 은퇴와 함께 끝나 있을 테고, 그냥 '살아있는' 것에 만족한 채 살아지고 있진 않을까. 


KBS1 <인간극장>은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배우의 삶을 조명했다. '국민 배우'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이순재, 그의 나이 85세다. 연기 경력만 무려 63년이다. 저절로 경외심이 들게 만드는 숫자다.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시절, 영화 '햄릿'을 보고 연기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연기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연극 <지평선 너머(1956)>로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길 인생이다. '거침없이 직진'이다. 



남들은 이미 은퇴를 하고도 남았을 시기지만, 이순재는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 편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연극이지만, 그는 지난해 <그대를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당신>, <장수상회> 등 여러 무대를 동시에 소화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젊은 사람들에겐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자신은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찾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좀더 힘을 내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이순재의 엄청난 활동량은 연극 말고도 여러 분야로 이어지고 있다. 배우 지망생들을 위한 특강,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단체에서 주관하는 남북한 문화교류 행사까지 다양하다. 조선왕릉역사영화제에 초대받아 젊었을 때 출연했던 영화 <문정왕후>(1967)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또, 후배 양성을 위해 21년째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운데 뭘, 아침부터 와서 번번이 찍어요."


이순재는 아침 일찍부터 집밖을 나서며 카메라를 향해 무심히 한마디 던진다.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퉁명스러운 듯 하지만, 곁의 사람들을 살뜰히 챙긴다. 식당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제자들을 걱정하며 숟가락을 뜨는둥 마는둥 하는 그를 보며 까마득한 제자 한상연은 이렇게 말한다. "공부도 공부인데 이런 것도 많이 배워요. 너무나 멋있는 어른. 저도 나이가 들면 멋지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되겠죠?"


이순재는 손주뻘인 제자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린다. 나이 먹어서 폼잡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젊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으려 한다며, 후배들과 어울리기 위해 먼저 다가간다고 한다. "나 혼자 버티면 나만 외롭지." 이순재의 말에서 권위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자 젊은 후배들도 편하게 대한다. 또, 후배들의 식사를 꼼꼼하게 챙긴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입은 무거워지고 지갑은 가벼워져야 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 중이다. 


나문희는 이순재를 "늘 푸른 소나무"에 비유하며, 내면의 정열이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이라 설명했다. 오로지 연기만을 바라보며, 연기만을 고민하며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쉼없이 연습에 매진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대사를 외운다. 그는 부단히 노력하는 배우다.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런 모습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살아있는 교과서와 다름 없다. 



"우리가 가 보지 않은 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곳을.. 정말 하얀 눈이 내렸는데 발자국이 딱 있는 거예요. 왠지 여기만 이렇게 따라가면 안전할 것 같고 여기로만 가면 우리의 목표치에 도달할 것만 같은, 그런 분이죠." (최수종)


그가 가는 길이라면 믿고 따라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하는 선배, 의심 없이 마음 놓고 존경할 수 있는 어른. 이순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로 자리매김 했다. KBS <풍운>(1982) 속 흥선대원군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단박에 담배를 끓을 정도로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졌고, 작품을 위해서라면 '야동 순재'라는 별명도 마다하지 않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김없이 제자들의 연습실을 찾는다. 


'어디서 이런 열정이 나오시는지 궁금'하다는 제작진에게 '책임감' 때문이라 답한다. 쉼없이 달려온 63년, 하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2018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는 자리에서 "아직 욕심이 남아 있어서 더 할 생각입니다"라고 당당히 밝혔다. 그의 욕심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의 말에서 해답을 찾고, 두려움을 잠시 잊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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